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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데르와 Dec 13. 2023

4. 분홍빛 벽돌집

벗어날 수 없는 숫자지옥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었을 만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초등학생 때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어려운 단어가 없어서 금방 읽었다. 어린 왕자의 엉뚱함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이 술술 지나갔다. 코끼리, 모자, 보아뱀, 장미, 여우 등 책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나 많이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정말 잘 쓰인 책 같다.

   중학교 독후감 활동 시간에 어린 왕자를 골라 한 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무렵에는 손바닥 만한 작은 책이 굉장히 유행했다. 어린 왕자를 비롯한 세계 유명 소설들이 손바닥 책으로 쏟아져 나왔다. 핫트랙스를 구경하고 난 후 그 안의 작은 교보문고 코너까지 둘러보는 것이 귀갓길의 작은 재미였다. 책멋들어진 액세서리관심받던 때도 있었는데.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10만 프랑(약 1억 5천만 원) 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감탄합니다. "아, 참 좋은 집이구나!"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좋아하던 내용 중 일부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보았다. 정말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요즘에는 집 사려면 1억 5천은 어림도 없지…….'였다. 찌들고 낡아빠진 어른의 숫자 개념을 꼬집는 부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릴 때는 이런 어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분홍빛 벽돌집'이라는 상상만 해도 예쁜 보금자리를 왜 숫자로 판단하지? 집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과 분위기에 집중하면 큰일 나는 건가? 작은 분노를 품은 궁금증은 세월과 경험에 깎이고 깎여서 모래가 되었고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나이가 적은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10대까지였나, 아니면 20대까지였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은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학창시절에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우쭐했다.

   많은 것이 변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 생각이 변하든 주변 환경이 변하든 어쨌든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나의 나이를 더이상 학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부터 냉소적인 면모가 늘어났다. Mbti의 F가 90%를 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T가 나온다. 감정 동기화가 너무 잘 되어서 밖에서는 조금이라도 슬픈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나와 상대를 지나치게 잘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것이 이렇게나 시나브로 바뀌었다.

   동심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경각심마저 살짝 든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상상력을 가동하면서 감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을 가끔씩 느끼면 그 행복의 고점이 더 높은, 뭐 대충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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