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었을 만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초등학생 때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어려운 단어가 없어서 금방 읽었다. 어린 왕자의 엉뚱함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이 술술 지나갔다. 코끼리, 모자, 보아뱀, 장미, 여우 등 책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나 많이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정말 잘 쓰인 책 같다.
중학교 독후감 활동 시간에 어린 왕자를 골라 한 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무렵에는 손바닥 만한 작은 책이 굉장히 유행했다. 어린 왕자를 비롯한 세계 유명 소설들이 손바닥 책으로 쏟아져 나왔다. 핫트랙스를 구경하고 난 후 그 안의 작은 교보문고 코너까지 둘러보는 것이 귀갓길의 작은 재미였다. 책이 멋들어진 액세서리로써 관심받던 때도 있었는데.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10만 프랑(약 1억 5천만 원) 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감탄합니다. "아, 참 좋은 집이구나!"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좋아하던 내용 중 일부를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보았다. 정말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요즘에는 집 사려면 1억 5천은 어림도 없지…….'였다. 찌들고 낡아빠진 어른의 숫자 개념을 꼬집는 부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릴 때는 이런 어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분홍빛 벽돌집'이라는 상상만 해도 예쁜 보금자리를 왜 숫자로 판단하지? 집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과 분위기에 집중하면 큰일 나는 건가? 작은 분노를 품은 궁금증은 세월과 경험에 깎이고 깎여서 모래가 되었고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나이가 적은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10대까지였나, 아니면 20대까지였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은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학창시절에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우쭐했다.
많은 것이 변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 생각이 변하든 주변 환경이 변하든 어쨌든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나의 나이를 더이상 학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부터 냉소적인 면모가 늘어났다. Mbti의 F가 90%를 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T가 나온다. 감정 동기화가 너무 잘 되어서 밖에서는 조금이라도 슬픈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나와 상대를 지나치게 잘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것이 이렇게나 시나브로 바뀌었다.
동심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경각심마저 살짝 든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상상력을 가동하면서 감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을 가끔씩 느끼면 그 행복의 고점이 더 높은, 뭐 대충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