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그 애를 만났어. 되게 온화하더라고. 표정이나 몸짓이 따뜻해서 같이 있으면 겨울인 걸 잊을 정도였어. 제일 신기했던 건 피부가 하얘서 집에서 종이접기 하는 게 취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운동을 잘하더라. 구기종목을 좋아하던데 그 애를 볼 때면 늘 선크림의 중요성을 떠올렸다니까.
수수한 스타일인데도 액세서리가 잘 어울리는 그런 애였어. 특히 목도리가 잘 어울렸는데 까만색이든 빨간색이든 그 애한테는 다 예쁘더라. 겨울에 만나서 다른 것보다 목도리가 더 인상 깊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하루는 뭐든지 잘 어울리는 그 애를 두고 모자를 씌웠다가, 목도리를 둘렀다가, 장갑을 끼웠다가, 난리를 부렸는데 그냥 가만히 나를 바라봤어. 아니, 화가 나서 싸늘하게 응시하는 거 말고.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길래 사실 조금 찔렸어. 보기만 해도 장난이 치고 싶어 진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던 걸까?
그 애는 창가에서 핫초코 마시는 걸 좋아했어. 드라마 같은 설정이라고 비웃으면 안 돼. 그건 그 애가 진짜로 좋아하던 시간이거든. 우선 처음에는 핫초코를 막 담아서 뜨거운 머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창밖을 바라봤어. 살짝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겠지.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그 광경을 눈에 담느라 핫초코가 볼품없게 식어버린 날도 있었어. 어쨌든 핫초코를 후루룹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시간이 지나면 그 애는 머그를 들고 조용하게 맛을 음미했어. 와인을 마시듯이. 그 모습이 웃기진 않았어. 남을 의식하거나 콘셉트를 잡아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콘셉트라 하더라도 그게 비웃을 명분이 되지는 않지만.
목도리를 목에 꼭 맞게 둘러주면 미세하게 올라오는 볼살이 참 귀여웠는데.
그 애는 3월 어귀부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용하고 꾸준하게. 당연히 붙잡고 싶었는데, 말했잖아. 그 애는 콘셉트 같은 거 없어. 잡아달라고 유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어. 시종일관 담담하더라고. 그래서 말릴 수도 없었지, 뭐. 떠날 준비를 하느라 그나마 있던 볼살이 점점 말라가는데,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붙잡고 드러눕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거 없이 미안함이 범벅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그 애를 생각해서 참았어. 내가 철없이 굴어도 든든하게 지켜봐 주던 그 애 앞에서 나도 한 번은 어른답게 행동하면 좋잖아.
마지막은 사실 잘 기억 안 나. 가슴이 찡해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나 봐. 같이 있는 시간이 그렇게나 좋았는데 이건 또 웃기지. 간신히 쥐어짜 내자면 마지막에 웃고 있었던 것 같아. 당연히 나 말고 그 애가. 온화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어. 미운 말도 못 하게. 그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그냥 그 기저부터 잘못된 거야.
달큼한 핫초코, 색색깔의 목도리, 조용한 온화함. 이것들을 망라하는 '겨울'이라는 계절 때문에 겉옷을 걸치는 날씨가 되면 항상 그 애가 떠오르더라. 지금도 봐.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쌀쌀해진 아침 공기에 코를 훌쩍이면서 나는 그 애를 추억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