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눈을 좋아하던 어린이였다. 고개를 홱 꺾고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봐도눈의 분명한 시작점이 없다는 점이 신비로웠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부터 팔랑팔랑 내리는 함박눈은 참 마음에 들었다.
나는 초등생일 때까지 연립에서 살았다. 꼬맹이여서 더 그랬는지 몰라도, 주차장 겸 연립 담장 안쪽은 나에게 꽤 넓은 공간이었다. 큰 운동장처럼 느껴졌다. 눈이 오는 날이면 널찍한 그곳에서눈사람을 만들었다. 내 몸만 한 눈사람을 만든 적도 있었지만 보통은 손바닥에 올릴 수 있는 작은 눈사람이 완성되곤 했다.
다들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으면 영원히 볼 수 있겠지?' 나는 눈사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요오즘 냉장고와 달리 구형 냉장고는 냉동실이 위쪽에 있어서 당시의 나는 의자를 밟고 냉동실 문을 열어야 했다. 그날부로 눈사람은 냉동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매일 냉동실 문을 열어보며 행복해했다. 바깥에 쌓인 눈이 녹더라도,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어둔 똑똑한 나는 눈사람을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어린 나를 격앙시켰다.나는 한껏 뿌듯해하는 파이리처럼 위풍당당했다.
여느 날처럼 냉동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눈사람 크기가 미묘하게... 이 생각이 든 후부터 눈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작아졌다. 너무 속상했다. 냉동실은 모든 게 얼어 있어야만 하는 곳인데 내 눈사람은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었다. 겉면에 눈을 더 붙여주고 싶었지만 바깥의 눈은 이미 다 녹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기화 현상에 대해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중학교 지구과학 수업이었을 것이다. 눈사람 덕분인지는 몰라도, 수학/과학 젬병이었어도 지구과학에는 곧잘 흥미가 붙었다. '기화'라는 단어를 배울 때의 느낌이 지금도 기억난다.
「너도 처음에는 꽤 오동통했어. 내가 고사리손으로 눈을 꼭꼭 뭉쳐서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그치만오도카니 앉은 채로여위어가던 네모습이 아직도 훨씬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거 알고 있니.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그 시절의 내가 겪은 제법 충격적인 일이라 그랬나 봐.
매 겨울마다 길가의 눈사람을 보면 나는 늘 너를 떠올려. 네가 다른 아이의 냉동실에서는 더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좋겠어.
몰랐는데 나 그때 정말 속상했나 봐. 왜 지금에서야 눈물이 나는지. 그땐 영문도 모르고 너를 보내줘야 해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