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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 Fontes Sep 26. 2015

세 사람 (2)

세 사람 (2)


성경에는 세 명의 왕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12지파가 각각의 땅을 지정하여 정착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정복자요 외지인으로 정복당한 현지인들과 끊임없이

생존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사상으로 유대교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군사 등 모든 지배원리

의 근간이 되었다. 즉 주변 부족과 달리 왕이란 개념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지도자가 전체 민족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일일이 구속하고 간섭함으로써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 즉 인간의 속성대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속성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이에 이스라엘 민족은  인근 부족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도전하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에게 왕이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사망이후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어저온 약200년 시대를

사사시대라 이름하는데, 드보라 기드온 삼손 등이 대표적인 사사로서 환란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세워진 첫번째 왕이 사울왕,   두번째 왕이 다윗왕, 세번째 왕이 솔로몬 왕이다.



(1) 사울 왕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B.C. 1012년경이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농부의 아들로서 성경을 보면 외모가 준수하여 베냐민 지파의 영웅이었던것 같다.(사무엘기상 9:1~2). 당시 예언자요 제사장으로서 활약한 사람은사무엘로서 사울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보다는 주로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 받은 것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원했던 완전한 왕의 기능을 실행하기 보다는 향후 이스라엘 왕이 갖추어야 할 것을 알려주기 위한 시험대에 올려진 의미로서의 첫 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성경에 나타난 사울 왕의 업적을 보면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 위한 기초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외부 세력(블레셋)을 이스라엘 진영에서 쫓아내고 국가운영을 위한 기초 법령을 만든 것이외에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당시의 상황이 그러하여 그랬겠지만 사울 왕의 대부분의 치적은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하나님이 전쟁에 대한 향방의 키를 쥐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음을 사무엘을 통해 보여 준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요구한 왕이 세워지고 그 왕을 통해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지만 그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망각한 것, 나로인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오는 교만이었다.


사울 왕은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변명하고, 임의로 제사장직까지 남용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울은 점점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져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사람이 되고 만다. 이후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 마지막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전사한다.


사울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왕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왕이 되었다. 선택받음과 왕으로 세워짐은 영광스러움이 틀림없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도않은 것 같다.

하나님은 사울왕이 교만질 수 있다는 성품을 모르셨을까? 사울이 변할 수 있다는 징조가 보였을 때 따끔히 가르칠 수는 없었을까?

이미 알고 계셨다면, 고칠 수 있었는데 훈계치 않은 것이라면, 또 다른 어떠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까?  

성경에 다 기록되어지지 않은 이런저런 사건과 교만이 계속되어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 가운데 드는 확실한 생각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울 왕. 그 사울의 고뇌와 아픔, 그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개인의 인생보다 그에게서 나오는 반응과 하나님의 모습이 더 중요한 관심 사항으로, 사울 개인에게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이루어진 선택과 왕의 등극은 독이든 성배와 같이 치명적인 인생의 전환점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관계라는 관점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진 현재의 희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사울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왕으로서의 임무보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위한 희생적 도구로서의 임무가 더 컸다는 생각이다.



(2) 다윗 왕


다윗은 B.C.1107년 유다 지파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두번째 왕으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그는 양을 치는 목동이었으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거인 골리앗을 일거에 물리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라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중앙무대에 급부상하였다. 물멧돌로 골리앗을 물리친 일화는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 무용담으로 실로 대단한 전투신이 아닐 수 없다. 그이후 이스라엘민족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하며 다윗을 칭송하였으나 그것이 다윗에게는 시련의 시작이 되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였음에도, 승승장구하는 다윗을 가장 큰 정적으로 여겨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궁중에서 살기 넘치는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에 숨어들어가 미치광이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광야생할을 하며 피신생활을 했다. 사울은 다윗을 찾아 죽이려하였으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의 옷자락만 베어 죽일 의도가 없음을 분명하였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도망자 신세의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요나단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그의 아들을 돌보아 우정과 의리를 끝까지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왕이 된다. 그는 사울과 달리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보여 줌으로 사울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윗 왕의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말해주는 모델로서 사울 왕이 첫번째 왕으로서의 교훈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 준다. 다윗 왕은 완벽하고 옳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범죄도 저지를고 실수도 많이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고 인정하셨다.


성궤를 찾아올 때 아내 미갈이 흉을 볼정도로 그의 하체가 드러나도록 춤을 추며 기뻐하였고, 하나님이 허락치 않은 인구조사로 역병이 돌았을 때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재를 올리며 하나님께 속죄를 하였고, 전쟁중에 있는 장수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전장에서 죽게 했으나 선지자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이후 닥쳐오는 환란을 감내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아들의 반란과 아들의 죽음... 많은 고통과 죄의 반복을 거듭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하셨고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최고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우리들의 시각으로 볼 때 다윗 왕은 사울 왕보다 더 많은 죄악을 지었음에도 인정을 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가능했을까?

하나님은 회개를 하는 모습,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죄악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것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죄를 멀리하는 것보다 죄를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차피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의 무겁고 가벼움은 의미가 없다고 보시는 걸까?


다윗 왕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죄악 때문에 하락을 하지 않으셨고 그의 아들때에 지을 것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을 지을 수있는 모든 재료들을 각처에서 공급을 받아 준비했다. 하나님에게 아무리 인정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구분은 명확한 것 같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걸음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시각에서 다윗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결국 돌이켜보면, 사울 왕의 삶과 역할, 다윗 왕의 삶과 역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하는냐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나는 무슨 역할을 맡아 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어차피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니 그것을 평안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는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3) 솔로몬 왕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후계구도에서 가장 근접해 있던 이복 형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죽임을 당함으로서 왕이 되었다. 솔로몬은 다윗 왕의 가장 아픈 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원래 이스라앨 장수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다윗의 음모로 남편이 전장에서 죽은후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의 둘째 아들이다.


솔로몬 왕은 태어남이 순탄치 못한 것에 비해 앞의 두 왕보다 평안하면서도 화려한 삶을 살았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 세종대왕때처럼 태평성대의 시기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위상은 주변국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지혜의 왕이라고도 불리우는데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올림으로써 지혜와 더불어 모든 것을 받아 누렸으며(왕상 3:4~15) 특히 솔로몬의 재판이라 불리는 두 여인과 아이 소유에 관한 재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솔로몬 왕은 총명과 지혜의 대명사로 여겨졌으며 시바의 여왕이 수수께끼를 통해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는 장면은 오페라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말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솔로몬 왕 말년에 이방여인들과 가까이함으로 이방의 우상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이로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때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을 지혜의 왕으로 삼았지만 결국 우상숭배라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도 이미 알고 계셨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워 달라 했을 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진행해오신 것일까?

다윗 왕이 마음에 흡족했다면 솔로몬 왕도 그리 삼아 자자손손 모든 국가의 모델로 보여주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왕 초기 지혜의 왕으로 화려함을 갖게하고 말년에 우상숭배로 인해 후대에 분단을 넘어 식민지배의 고통의 세월을 갖게 한 것은 하나님의 무슨 뜻이엇을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왕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로터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영광의 결말을 맺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그 결과 지혜와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기쁨의 소망도 갖게 하였다. 그리하였던 그가 말년에 몰락하여 이스라엘 방황의 단초가 되었으니, 현재의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의 무상함을 또 한번 생각해 본다. 이 세상의 것이 내 소유인 듯하나 잠시 나의 손에 맡겨져 있을 뿐 영원한 것이 없으니 솔로몬 왕이 고백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할 것이다.






위 세 왕은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외모의 준수함으로 사람들로 칭송받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누구에게로 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한 교만함으로 인간의 가장 밑바닥의 감정까지 드러내었던 사울 왕.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필부와 다를 것이 없어보인다.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누리고 있으면 교만함으로 주변사람을 내려다 보며 무시하기 일쑤인 우리들의 모습. 나보다 좀 더 갖고 좀 더 누리면 질투와 시기하는 모습...  우리가 사울 왕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본다.


다윗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었나 한다. 회개란 잘못한 것을 뉘우쳐 같은 죄를 또 범치 않는 것이기에 다윗은 지은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다시 짓지않는 그 모습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였다.


솔로몬 왕처럼 모든 것을 받아 누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재물, 지혜, 권력 무엇하나 남부럽지 않은 혜택 속에서 누리며 살았으니 최고의 인생을 살았다하겠다. 그러한 그가 다 헛되다 하며 허무를 말한다. 누려보지 못한 우리가 다 누려본 사람의 말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마는, 그래도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지난날과 오늘을 보아 내일을 생각해보면 그무엇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을 쫓아 사는 우리의 모습이 헛되다는 것일까? 



각 인생마다 옹이지고 굽어진 흥망성쇠가 있고, 또 누구나 흥하기를 추구하지만 결과가 꼭 그렇지는 않으니 그 구비구비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세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니 실체는 과거의 시간속에 존재하고 지금은 사연만 남아 교훈을 주니 목숨을 걸고 아둥바둥하는 것이 다 헛된 것이라... 결국 인생이란 영원한 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요 이 세상은 들러가는 잠깐의 시간으로 머무는 동안 베풀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런것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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