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와 정도전
경제는 한 국가의 기틀이다. 나라 경제가 안정화 되어 있을 때는 태평성대라 할 정도로 정치 문화 사회 모든 것이 안정화 되지만 경제가 흔들리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지면 민란이 일어나고 정치의 혼란 및 부재로 나라마저 전복되는 것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가 무너져 후삼국이 되는 경우도 그랬고 고려가 무너져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러했다.
고려말은 원나라를 따르는 사람들과 명나라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 권문세족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 불교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던 시기였다. 권문세족은 몽골 침략에 협력하였거나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함께 생활하였던 사람들로 대부분 벼슬과 권세를 누린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을 말하는데, 이들은 음서제를 통하여 그들의 권력과 이권을 지켜나갔다.
고려말의 최대 문제는 토지와 생산에 관련된 민생경제였다. 일반 백성은 대부분이 소작농이었으므로 소출의 1할은 국가세금으로 4할은 지주가 나머지 5할은 소작농이 가져가는 형태였으나 1할의 국가세금은 부임하는 관리가 녹봉으로 가져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는데, 신임 관리가 오더라도 구임 관리가 자기의 몫을 계속 주장함으로 한 토지에 3~4명의 권리주장은 다반사고 심지어 8~10명의 권리 주장을 하는 토지가 발생하여 빚을 내더라도 감당이 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농경사회에서 토지는 국가 및 민생경제의 가장 중요한 경제요소중 하나로 토지 및 생산물의 분배와 비축이 곧 국력이었다. 토지와 소출의 문제는 국고의 바닥과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으나 정치적 권력과 경제권이 권문세족들의 전유물이라 사실상 개혁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한 고려말 배경은 개혁파의 등장을 가져왔고 그 중심에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당시 신진사대부는 고려 후기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기본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모순을 없애고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개혁정치를 이끌었고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무렵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로 나뉘었다.
공민왕의 죽음후 권문세족의 대표인 이인임의 척결, 위화도 회군,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우왕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활을 한 인물들이 이성계를 중심으로한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역성혁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갈림길에 섰다.
고려 말기의 문신·외교관이자,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본관은 연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2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상북도 영일현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망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종(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위키 백과】
정몽주는 왕권을 바로 세우고 민생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권문세족들의 부패청산을 선결 과제로 보고 최영과 함께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이인임을 척결하였으나 최영의 개혁의지와 방향성에 실망하여 이성계와 정도전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역성혁명에 대한 이견으로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무신(武臣) 및 유학자(儒學者) 겸 시인(詩人)이며, 외교관(外交官), 정치가(政治家), 유교 사상가(儒敎 思想家), 유학 교육자(儒學 敎育者)이다.호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단양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그는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정벌(1388년 음력 6월)과 과 제2차 요동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8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고종때 복권되었다. 【위키 백과】
정도전은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부패 척결을 위해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다시 재분배하는 계민수전을 주장하였던 급진개혁파였다. 그는 권문세족 이인임과의 갈등으로 나주로 유배되는데 이때 정몽주로부터 맹자 책을 받아 탐구하며 역성혁명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정몽주의 소개로 만난 이성계를 통해 역성혁명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몽주는 권문제족을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하여 개혁을 하면 민생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혁신(innovation)을, 정도전은 고려는 뿌리까지 부패해 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혁명(revolution)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목은 이색의 문하생으로 서로를 아끼고 끌어주며 고려말 피폐한 민생과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힘을 합쳐 권문세족을 척결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후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정치적 판단과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결국 정몽주는 비명횡사를 하고 만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민생경제의 회복이 국가의 안정이라는데는 동의하였으나 정몽주는 민생경제의 안정을 통한 왕권 강화에 관심을 두어 고려의 체제하에서 점차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정도전은 철저한 민본사상으로 왕권을 최소화 및 견제하는 신권정치에 더 큰 관심 두어 이것은 현 체제가 아닌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움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 문화와 모든 것을 바꿔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역사란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혁명을 일으킬 때에는 정도전과 같은 급진파들이 득세를 하여 정권의 주도권을 잡게 되지만 정권의 안정기에 들어가면 정몽주와 같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충절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정몽주나 정도전 모두 이방원에게 피살되는 기구한 운명이면서도 역성혁명을 반대한 정몽주는 복권되고 조선 개국 1등 공신의 정도전은 이방원으로부터 폄하되는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군사혁명(혹자는 쿠테타라고도 평함)으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정도전을 폄하하고 정몽주의 절개를 높이 사는 교육을 실시하여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정도전보다 정몽주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몽주의 충절이 역사적 관점에서 집권자의 논리에 의한 과대포장 및 해석과 학습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는 시각과 더불어 정도전의 민본사상이 재평가되고 있다. 정도전의 사상은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이 결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으로,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부패 척결을 목적으로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민생경제를 국가존립의 근간으로 보았던 정치가 정몽주와 정도전.
당시의 토지개혁이 '이밥'이라하여 이성계를 칭송하는 지경까지 이른 걸 보면 고려말의 민생경제가 얼마나 도탄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과 혁명... 시대적 상황논리와 추구하는 이념에 따라 어느 것이 더 옳고 더 효과적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권문세족과 맞서 싸우고 법안을 재정비하는 그들의 모습을은 이 시대에도 많은 귀감이 되는 것 같다.
부익부 빈익빈 그 골의 깊이가 점점 더 가속화되어져 가는 현실,
청년실업률이 날로 최고치를 경신하는 현실,
비정규직의 확대가 고용시장의 탄력성이라 여기며 값싼 인력의 고용을 원가 절감이라 여기는 현실,
나날이 늘어가는 가계부채를 각 개인의 탓으로만 여겨야 하는 현실,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는 많은데 실상 당리당략으로 명분과 주장이 더 앞서는 현실....
정몽주와 정도전!
그들이 이 시대의 정치와 경제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떠한 정책으로 어떠한 행보를 보여줬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