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
마라톤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북동쪽 약 30Km 떨어져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이 곳에서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뛰어가 전한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기리는 뜻에서 1896년에 올림픽에 채택된 육상 경기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파견하였으며 페이디피데스는 약 200Km의 거리를 이틀에 걸쳐 돌주하였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원군을 파병하는데 동의 하였으나 스파르타의 전통에 따라 만월에 출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도움없이 몇몇 동맹도시의 도움으로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것이 오리엔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다리우스1세가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나섰으나 실패한 제2차 그리스 원정이다.
기원전 499년으로 폭풍에 의해 함대가 난파되어 실패한 1차 그리스 원정을 만회하고자 2차 그리스 원정을 야심차게 준비하였으나 20여만명의 페르시아군은 밀리테아데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 보병 1만여명에게 마라톤평야에서 무참히 패배하였다.
이후 다리우스 1세가 죽고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80년 수십만명을 동원하여 육상과 바다를 통한 3차 그리스 원정을 실행한다.
육상에서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레 전투를 벌이는데, 영화 300의 내용이 그것이다. 그리스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협곡을 막기 위해 스파르타 병사 300명이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엄청난 수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스파르타군은 협곡에서 3일을 버티다가 모두 전사한다. 페르시아 군이 쏜 화살은 하늘이 가려져 태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으나 스파르타 군은 창이 꺾이면, 칼로 싸우고, 칼을 잃으면 단검이나. 손, 심지어 이빨로 페르시아 군과 필사적으로 맞섰다.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가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해다오."
그리고 해상에서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은 대패를 하고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끝을 맺는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을 페르시아전쟁이라 부르는데 이 전쟁을 기록한 책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이다. 기원전 5세기에 집필된 인류 최초의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동서양 대결이라 불리는 40여년간의 페르시아전쟁을 다룬 책으로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접근 방법과 비판 정신이 흐르는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라 칭송된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관습과 과거 역사에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 속에서 아테네의 지역적 애국정신, 그리고 방대한 제국 페르시아 속에서의 단일 지휘 체계 등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를 향한 그리스의 투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보고 이를 제시하게 이른다.
‘역사’는 좁게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여러 지역의 문화, 풍습, 역사도 폭넓게 다루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자들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하였는데 확인할 수 없는 증언은 적으면서 사실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썼다.
‘인간세계의 일은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지기 때문에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루어 놓은 수 많은 경이롭고 위대한 사적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특히, 전쟁을 벌인 이유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전문에서 말한 내용이다.
신의 뜻에 따른 숙명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엮어낸 역사의 인과관계를 탐구한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에 그리스어로 탐구를 뜻하는 <Historiai>라는 이름을 붙였다. chc 9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전반부 6권은 페르시아가 오리엔트를 통일해 대제국을 이루는 과정과 다리우스1세의 원정을, 후반부 3권은 크세르크세스의 3차 원정을 다루는데 마지막 9권은 미완성이다.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전쟁사를 다루면서도 결코 전쟁 이야기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키로스 2세의 바빌론과 마사게타이,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나일강의 범람과 그 원인에 대한 기술은 유명), 다레이오스 1세의 스키티아(스키타이), 리비아에 대한 민속지와 박물지적 기술을 섞어가며 지리를 기록하였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학적 발견으로 잘못이라 생각되었던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여러 차례 드러나면서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중반 이후 더 높아졌고, 이제 헤로도토스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민족지, 인류학의 아버지로도 평가된다.
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하에 지리, 풍속, 역사, 삽화, 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나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표현 등 변화가 풍부하다.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줄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이유이다.
‘역사’에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패인을 ‘오만’이라고 보았다. 그리스 연합군을 한 수 아래로 보았고 아테네신전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이에 헤로도토스는 어떤 인간이나 국가가 자기의 몫 이상의 것을 탐하는 탐욕스러운 행동을 할 때 신의 징벌이 내린다고 믿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평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교훈에 관심을 집중하고 행동하는 현 시대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그 당시의 사관의 관점에 따라 기록하더라도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 생명이며, 후대에서는 저마다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분석하며 현시대에 맞는 각자의 교훈을 찾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을 빼놓을 수 없듯이 이순신장군과 함께한 병사들과 백성들을 빼놓아서는 안되며,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해 독립을 외쳤던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수 많은 독립군과 더불어 수탈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을 잊어서는 안되며, 6.25전쟁에서 맥아더장군을 말하지만 군번도 없이 산화한 무명 용사들을 빼놓아서는 안되며, 한강의 기적을 말하며 수많은 산업 역군들을 말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인 노동자를 소외해서는 안된다.
작고하신 리영희교수님의 말씀처럼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이 세상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각자의 역할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평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을 강제해서는 안되며, 강제되어지지 아니한 다수의 시각은 자유로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시대의 거울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거스리려 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오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