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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 Fontes Oct 26. 2015

페스트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 그날도 평온하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의사 베르니르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가 복도에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쥐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자신의 집에서도 똑같이 피를 토하고 죽은 쥐를 발견한다. 그로 며칠이 지나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하여 집에서, 창고에서, 수채구멍에서... 떼를 지어 피를 토하고 죽은 쥐의 시체들이 발견된다. 사람들 곁에서 떼를 지어 죽은 쥐들로 도시는 발칵 뒤집어지고 결국 시장은 페스트(흑사병)을 공식 발표하고 도시는 완전 봉쇄된다.   


도시의 출입이 통제되자 도시에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고 절망과 죽음에 사로잡힌다. 감금상태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페스트가 지배하는 도시의 모습은 살벌한 기운이 감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행동만이 남아 있는가? 이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싸워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몇 가지의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이 재앙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앙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여 페스트를 환영하는 사람, 페스트에 맞서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재앙을 받아들인다.   


리유는 

보건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 맞서기로 한다. 그는 페스트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일 처음 깨달은 사람이다. 리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악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반항인이고, 그의 투쟁은 인간의 부당한 현실에 대한 항의였다. 그는 ‘체념하고 페스트를 용인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거나 눈 먼 사람, 아니면 비겁한 사람’이라 한다. 리유는 점차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신부님, 이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이런 아이들마저 죽도록 창조된 세상이라면 나는 그 세상을 목숨바쳐 거부하겠습니다’ 리우는 타루와 함께 민병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 싸운다.      


타루는 

여행차 왔다가 페스트를 피하여 오랑 도시를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혼자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는 탈출을 포기하고 리유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 싸운다. 그는 오랑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다.   


파눌루는 

신부이다. 그는 ‘페스트는 악인의 죄를 응징하기 위해 신이 직접 내린 벌’이라며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린다. 그는 후에 리유나 타루처럼 사람들을 도우며, 페스트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동참하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무구한 아이가 하나둘씩 고통을 받으며 죽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아이들의 죄가 무엇이건데 그 죄를 벌하기 위해 무구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단 말인가? 이 일이 있은 후에, 파눌루는 새로운 강론을 쓰기 시작한다. 두 번째 강론에서 파눌루는 페스트가 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코타르는

그는 범죄인이며 페스트로 거의 절멸상태에 이른 오랑의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다. 모든 이들이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그 때문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연기된 것을 그는 즐기고 있다. 그는 판결을 받기보단 자살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기고 자살을 기원하기도 했지만 페스트가 희망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숨막히는 혼란, 죽음의 공포, 고통스런 이별... 그렇게 싸운지 1년 후, 드디어 페스트는 물러가고 축하의 불꽃이 오른다. 그러나 리우는 이러한 환희가 계속 지속될 수 없음을 말한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로 몰아 넣을 것이다’        



페스트는 세계2차대전의 전쟁이 가져온 폭력과 파시즘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거부하거나 함부로 훼손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페스트에서 까뮈는 말한다. '인간의 악은 무지에서 온다. 가장 구제불능인 악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상상하고 그러므로써 스스로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를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이다'  마치 이렇게해도 될 것같은 스스로를 속이는 무지... 이 시대에 벌어지는 모든 부조리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페스트의 저자 알베르트 까뮈는  우리들의 삶에 숙명적으로 존재하는 부조리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를 묻고 있다. 리우와 타루처럼 이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신의 뜻이라며 체념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코타르처럼 부조리의 혼란을 틈타 나의 이익을 노리며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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