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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 Fontes Oct 30. 2015

운명

운명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전범’라 했던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프스 왕의 내용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북쪽 테바이라는 도시국가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오이디프스... 그는 신으로부터 “너는 네 아비를 죽이고 네 어미를 아내로 삼을 것이며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나을 것이니...”라는 저주를 받았더.


라이오스 왕은 예언자로부터 그 자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듣고, 간난아이인 오이디푸스의 발을 핀으로 단단히 묶어 죽이라고 왕비 이오카스테에게 시켰지만, 하인이 아이를 들판에 버린다. 오이디푸스는 목동들의 손을 거쳐 자식이 없던 코린트의  폴리버스 왕에게로 넘겨져 친자식처럼 키워진다.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폴리버스와 메로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누가 자신의 생부인지를 아폴로 신전의 예언자에게 묻자 예언자는 ‘자신의 어머니와 맺어지겠고 아버지의 피를 손에 묻힐 것이다’ 라며 오이디프스의 운명을 말해 준다. 낙담한 오이디푸스는 폴리버스와 메로페를 헤칠지도 모른다는 예언의 염려로 저주의 운명을 피하고자 코린트를 떠난다. 


테바이로 가는 길에 오이디푸스는 생부인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를 만나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각자의 전차 우선 통행을 위해 싸움을 벌이게 되고 급기야 라이오스 왕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다. 

“아침에 다리 네 족, 오후에 두 족, 저녁에 3족인 생물은 무엇인가?” 이에 오이디푸스는 사람이라 답한다. 

절망한 스핑크스는 스스로 절벽으로 몸을 던지고, 스핑크스의 저주로부터 테바이 왕국을 자유롭게 한 오이디푸스는 왕족의 신분을 얻고 이오카스테 왕비를 아내로 맞이한다.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벌로 신들은 테바이에 역병을 발발케 했고, 자신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이디푸스는 살인자를 찾게 되는데, 맹인 예언자인 티레시아스로부터 오이디푸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에 의해 버려진 아들임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 왕비는 목매 자살하게 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옷에 붙어있던 황금 브로치로 스스로 자신의 두 눈알을 파낸다. 그리고 오이디프스가 홀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운명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의미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一切)가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을 생각하였는데, 인간의 탄생을 지배하며 생명의 실을 짓는 클로토(Klotho)와 인간의 일생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라케시스(Lachesis),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여 그 생명의 실을 끊어버리는 아트로포스(Atropos)이다. 

또 기독교의 예정론처럼 원죄의 의식과 더불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미 만세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적인 운명이 있다.   


그러나 이와 다른 자유의지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죄와 자유의지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자유의지는 단순한 선택의 작용이 아니며, 의지의 전체와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회심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안셀무스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며, 자유 그 자체는 인간의 선택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본질을 가진다고 하였다.    



 

오이디푸스는 그에게 내려진 저주의 예언으로 정해진 운명대로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 딸을 낳았다. 그 운명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에야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소포클레스는 말한다. “인간의 삶은 제어할 수 없는 초월적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넘어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함으로 인생의 방향을 자기가결정할 수 있다고 반항 한다. “아폴론, 바로 그 분이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지만, 가련한 나의 눈을 찌르는 건 나의 손, 바로 이 손이로다”   


인생을 한 판의 카드게임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것대로가 아닌 딜러가 나누어 주는대로 나의  카드가 정해지는 것이 운명이라면, 받은 카드를 가지고 게임을 이루어 가는 것은 나의 몫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이다.    


나는 지금 운명의 덫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하여 살아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도 나는 그 중간의 어디쯤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지혜는 그 지혜의 소유자에게 어떠한 이익도 줄 수 없을 때 끔찍한 재앙이 된다.”라는 티레시아스의 말이 오이디프스 왕의 운명의 덫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지혜가 운명의 지배를 넘어 자유의지로 승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운명이 주는 한계와 절망을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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