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무실 환경은 그룹사에서 제공되었다. 생각보다 꽤 넓은 공간 안에 수십개의 책상이 이미 세팅되어 있는 사무 공간, 그 한복판에 덩그라니 앉았다. 수 많은 빈 자리를 둘러보며 앞으로 이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둘 채워져갈까 상상하며 설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0이다.
소개할 것이 없는 회사의 회사소개서
회사소개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회사는 어떤 회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경쟁력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있고,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낸 경험이 있습니다. 라고 써야 하는데, 쓸 내용이 없다. 모든 것이 미래의 이야기이기에 이건 그냥 '다짐' 같은 것이지 소개라고 보기가 어렵다. 다른 유사 기업들의 회사소개서를 보면서 이들은 이런 것들도 이미 다 갖춰놨구나라는 생각에 부럽기도 막막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0인 지금. 이렇게 큰 사무실에 나 혼자 덜렁 앉아 비어 있는 회사소개서를 자신있게 가득 채워갈 날은 언제쯤 올까 생각한다.
처음 하는 일을 하면서 답을 묻는 직원들
다행히 우리의 비전에 함께 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업계에서의 입지가 탄탄하고 수십년 간 인프라와 조직 문화를 다져온 곳에서 나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직원들은 내게 물었다.
“이건 누구에게 얘기하면 되나요?”, “매뉴얼이 어떻게 되나요?” “팀 구성은요?” 등등…
이미 갖춰진 회사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지만, 그 당연한 것들을 만들어 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당면 과제이자 그것이 곧 초창기 멤버의 공이라는 사실조차 이해시켜야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 일은 제 분야가 아니라서요”, “저는 이걸 하는 사람이라서요”
요즘은 “나의 전문 영역”,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업무인가”를 많이들 따진다. 그러나 초기 회사의 성장 과정에서 RnR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생각할 때 명확한 RnR은 때론 독이다. 조직 구조는 성장의 속도에 맞춰 계속해서 제 모습을 빠르게 변화시켜야 한다. 조직의 빈틈을 발견하고 빠르게 그 자리를 손에 쥐고 제 역할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런 체계도 없는 회사'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이들이 있다. 답답하겠지만, 처음부터 무언가를 정해놓고자 하면 당장은 마음이 편할지 모르나 성장의 속도를 방해한다. 명확한 RnR은 누구도 챙기지 않는 영역을 만든다. 그러나 초기 조직에게 비어 있는 영역은 너무 많다.
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이 된 것이 아니다. 대기업이 되었기 때문에 체계가 필요해진 것이다.
같은 업무 이력이라도 역량 차이를 크게 구분하는 한 가지가 있다. 누군가가 잘 세팅해놓은 기반과 매뉴얼 내에서 그 업무를 수행한 사람과 맨땅에서 그 기반을 어떻게든 만들어낸 사람은 천지차이이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가 발전한다.
"성장하는 인재가 되고 싶다"고 외치는 수많은 지원자들을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성장이란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생각한다.
핵심 인재가 만들어 놓은 밑바탕 위에선 사실 누구든 앉아 제 몫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조직의 기반을 만들어 내는데 두팔 벗고 나선 이들을 “개국공신”이라고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여러 사건들을 겪어내며, 그럼에도 결국 개국공신이 되어 가는 기특한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 시절이 희미해진다 하더라도 이들의 소중함과 가치를 끝까지 기억하고 함께 하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