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리튬 복용 시작
새해를 앞두고 ADHD외계인 말안들인과 함께 지구인 닥터의 연구실(병원)을 방문했다. 몇 달째 말안들인의 뇌파 패턴을 분석하던 닥터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조증 의심.” 그리고 이번엔 기어코 신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리튬(Li, 원자번호 3번).
주기율표 맨 앞자리를 꿰차고 있는, 우주 탄생 초기부터 존재했던 바로 그 원소. 내가 평소 리튬이라는 단어를 듣는 건 대게 전기차 광고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탑재”라는 문구를 볼 때인데, 이 녀석이 외계 생명체의 감정 에너지를 안정화시키는 약물로도 쓰인다니. 리튬의 이력서가 참 화려하다. 배터리도 충전하고, 조울증 외계인의 감정 파장도 조율하고.
물론 부작용 목록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갈증, 다뇨증, 신장 기능 손상 가능성. 과량 복용 시 몸의 떨림, 의식 변화, 설사…”
이건 뭐 외계인 생화학 실험 보고서 같다. 그래서 리튬을 투여받는 피실험자(환자)들은 정기적으로 혈중 리튬 농도를 체크해야 한단다. 마치 우주선의 연료 게이지를 수시로 확인하듯이.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닥터에게 물었다.
“혈액검사 안 해도 돼요?”
“용량이 너무 적어서 괜찮습니다.”
말안들인이 복용하는 양은 성인 기준 1/3이 안 된다. 우주선으로 치면 보조 엔진 정도의 출력이랄까.
초등학교 자퇴 후 첫겨울방학
학교라는 어린 지구인 개체들의 집단 거주지를 떠난 지 어느덧 3개월. 말안들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구인 사회 적응 프로토콜 ver 2.0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 보였다. 말안들인이 이룩한 몇 가지 성취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성취 1: 수학 경시대회 장려상
오프라인 수학경시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아왔다. 누군가는 “그거 참가상 아니냐”며 비아냥댈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이건 외계인 인내심 테스트 통과 증명서다.
ADHD 우주인에게 “한 시간 동안 좁은 교실에 수십 명의 지구인과 함께 앉아서, 온갖 소음과 자극 속에서, 움직이지도 말고, 어려운 수학 문제만 풀어라”는 미션은 사실상 극한 생존 게임이다.
ADHD 외계인의 생체 특성상 지루함과 주변 소음에 극도로 취약하다. 그들의 뇌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갈구하며, 단조로운 환경에선 마치 산소 부족 상태처럼 괴로워한다. 그런 핸디캡을 안고도 시험장을 무사히 탈출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성취 2: SR8
집에서 진행한 영어도서관 SR 테스트 결과, SR8 등급이 나왔다.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영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 말안들인을 영어유치원에 집어넣었던 그 암흑의 시절. 당시엔 이 아이가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인 줄 꿈에도 몰랐다. “빡세다”는 학습식 영유에 등록시켰는데, 수업시간 내내 울부짖고 교실을 무단 탈출하는 게 일상이었다. 입학 후 2주간 매일같이 담임의 긴급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엄마표 학습이 작동하는 걸 보니, 지난 8년의 노력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어 안도감이 든다. 이대로 계속 가면 꽤 괜찮은 지구인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적어도 지구에서 통용되는 국제 공용어, 즉 영어라는 생존 필수 언어를 마스터했으니 행성 어느 구역에 떨어져도 굶어죽진 않겠지.
약물 트리오의 기적
: 아빌리파이, 리스페리돈, 리튬
가장 기쁜 소식은 아빌리파이, 리스페리돈, 리튬 이 삼총사가 말안들인의 외계 생체 시스템과 놀랍도록 잘 맞는다는 것. 이제는 또래 지구인들과 함께하는 짝치료(일종의 사회성 훈련 프로그램)에 도전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예전의 말안들인은 감정의 진폭이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했다. 행복의 절정에서 분노의 폭발까지 0.5초. 마치 쌍성계처럼 극과 극을 오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혼이 났을 때도 타인에게 공격성을 분출하지 않고, 스스로 심호흡하거나 격리실(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성을 유지한 채 말할 수 있다.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물론 아직 완벽하진 않다. “아직도 엄마가 밉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덧붙이긴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정리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화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 언어와 감정 체계를 습득해가고 있다니.
부작용: 끝없는 식욕의 블랙홀
물론 부작용도 있다. 말안들인의 식욕이 소형 블랙홀 수준으로 증가했다. 하루 종일 배고파하고, 기존 섭취량의 3배를 먹어치운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현상이라 건강에 악영향을 줄까 심히 우려된다. 약물 투여량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 우주선 연료 효율 재조정이랄까.
4학년, 학교 복귀를 꿈꾸다
아직은 바람일 뿐이지만, 4학년쯤엔 학교에 복귀해 볼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또래 지구인들 사이에서 평온하게 생활하는 말안들인이라니. 참으로 벅차오르는 상상이다.
마치 아바타3에서 스파이더가 마침내 판도라 행성의 대기에 완벽히 적응해 그토록 답답했던 산소 마스크를 벗어던지는 순간 처럼, 말안들인도 지구라는 낯선 행성의 규칙과 공기에 적응해 드디어 또래들과 함께 숨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안들인도 결국 별에서 온 존재다. 다만 조금 먼 별에서 왔을 뿐. 그리고 지금, 이 아이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구에 적응하여 살아가는법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