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다가 또 버럭 했다. 점, 선, 면, 직선, 반직선, 선분, 중점, 평각, 직각, 둔각, 예각, 그런 개념들.
'도대체 이걸 어디다 써먹으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씨름을 한담'
근데 점을 찍고 선을 긋고 면을 그리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한대의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고 또 무한대의 선들이 결국 면을 이룬다. 아주 시시해 보이는 우연 같은 순간들이 모여 필연의 사건들을 이루고 그 뜻 모를 사건들이 한 폭의 인생으로 완성된다. ADHD 증상을 가진 아들과 엎치락뒤치락했던 모든 덧없어 보이는 미미한 기억들에 의미부여 작업을 했다. 도무지 가치 없어 보이는 사라진 순간들도 이 <초1adhd일기>를 쓰면서 새로운 의미로 엮어졌다.
ADHD 증상이 있는 초1 아는 매일 하교하고 나서 카페에 글을 끄적인다. 그 글들에 배경설명을 덧붙였다. 맨 처음에는 이런 책에 대한 구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쓴 글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도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아들의 글과 내 글을 콜라보하는 형식으로 에세이집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에서 반건호 교수님이 adhd는 완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생궤적 연구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adhd 아이가 어릴 적부터 써 온 일상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들이 학교 간 사이에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서 마을 지인들이 모여 장애공부모임을 해왔다.
'장애를 공부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제야 돌이켜보니 2022년을 뜻깊게 만들어 준 공부모임이었다. 여러 깨달음들이 있었다. 장애를 공부한다고 다 알 수 없다. 많은 장애 분야가 있다. 그리고 장애등록도 등급제가 사라져서 경증과 중증으로만 나뉜다. 그런데 같은 종류의 장애라고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를 겪고 있는 장애인을 만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장애인을 만난 것일 뿐 모두를 알 수는 없다. 그저 지금 관계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렇다. 아들의 기록도 단지 한 사람의 경험일 뿐이다.
그럼에도 ADHD 아들의 일상기록들이 초등생활에 있어서 당사자가 직접 쓴 생생한 기록이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서투른 일기 속에 아이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다. 앞서간 많은 adhd 선배들이 있고 뒤에 오는 많은 adhd 후배들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초등생활을 하는 아들의 기록들이 초입을 고민하는 예비 초등생 부모에게 참고가 될 것이며,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비슷한 고민을 하기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이 과정을 지난 선배들은 읽으면서 자신이나 자녀의 우당탕탕한 학창 시절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고 치료하는 분들에게는 당사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아들은 더디지만 성장해 왔다. 내 아이 자체가 adhd는 아니다. 내 아이는 adhd 증상이 있을 뿐이다. 그 증상을 극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들이 그 증상이 더불어 살아가는데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고 그 성장통 속에서 아들의 마음과 영혼이 자랐다.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여러 관계와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때론 웃고 울고, 때론 달리고 넘어졌다. 그 모든 순간들이 아들의 인생의 점.선.면이 되고 있다.
이 글을 편집하는 엄마로서 나 또한 뼈 아픈 성장통이 있었다. 때론 우울하고 불안했고 때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고, 때론 화냈고 칭찬했고, 때론 넘어지고 일어났다. 빗나간 모성의 발로일지라도. 확실한 것은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다. 늘 노력했고 기도했지만 늘 부족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담금질해 왔다. 아직 그 채찍을 내려놓을 시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비 개인 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당당하게 눈앞의 현실에 마주할 조용한 결심을 하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후일에는 이 치기 어린 마음이 식어서 못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 오늘부터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