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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Feb 18. 2019

울어야 산다

울어도 된다, 그래야 웃을 수 있다




마음이 울음을 멈추지 않을 때가 있다. (중략)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고 더욱 아파지는 느낌, 도무지 헤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분명 아픈 일일수록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행복은 그리도 쉽게 허망하게 사그라드는데, 왜 어떤 슬픔은 갈수록 더욱 날카롭게 또 절절히 느껴지는 걸까. 

네이버 블로그: 아는 정신과 의사의 마음이야기



어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다. 진심과 정성이 담긴 글에 마음이 움직였다.







울지 마,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어린 시절 나는 울보였다. 나의 감정은 남들이 가진 것보다 쉽게 또 자주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울진 않았다. 눈물은 내가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때로 나는, 혹은 자주 나는 그 눈물 때문에 혼나곤 했다.


처음에는 다른 문제로 혼이 났는데 끝에는 늘 눈물이 문제가 되었다. 그냥 '잘못했습니다'하고 반성하면 될 것을 괜히 눈물을 흘려 일을 크게 만든다고 했다. 늘 내 잘못은 아니었는데 억울한 마음에 울어도, 가족은 내게 잘못을 시인하길 바랐다. 할머니는 우는 걸 참 싫어하셨다. 하지만 울지 않는 건 꽤, 불가능하리만큼 힘든 일이었다. 내게 눈물은 감정의 무조건 반사였다.


울지 않으려 몇 가지 노력을 했었다. 처음에는 울고 있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더 눈물이 났다. 그다음엔 '울지 마, 울어봤자 나한테 도움될 게 하나도 없어. 나중에 커서 복수하자. 나를 울린 사람들을 찾아가서 한 명 한 명 다 복수해줄 거야'하며 이상한 복수심으로 나를 달랬다. 그건 꽤 효과가 컸는데, 단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는 것뿐이었다. 내 슬픔과 억울함은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왜 울어? 그런 일로, 아마추어같이!


눈물을 멈추기 위한 노력은 20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이 생겨 울고 말았는데, 이번엔 놀림을 받았다. 내게 아마추어 같다며, 울지 않는 선배를 보고 본받으라고 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하라고 놀린 건데 나는 그만 부끄러워하고 말았다.


어떤 날은 동료가 울었다. 선배가 정말 못되게 나쁜 말을 해서, 그걸 들은 동료가 울었다. 그런데 운다고 또 혼이 났다. 뭘 잘했다고 우냐고, 울지 말라고 혼이 났다. 어렸을 때 내가 들었던 말과 꼭 닮았었다.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울다가 벌게진 눈으로 자신의 모니터를 쳐다봤다. 

또 어떤 날엔 선배가 울었다. 대표에게 혼이 난 그녀는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갔다. 한참 뒤에야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부어있었다.


직원이 몇 명 안 되는 회사에서 참 많은 날들 동안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울지 않으려 애썼다. 울면 나약한 것, 아마추어 같은 것, 부족한 것으로 비난당했다. 반면 울지 않은 이에겐 프로답다고 했다. 나는 그 프로답다는 말이 찬사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도 그 찬사를 받고 싶어, 더욱 울지 않아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우는 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우는 건 안 좋은 거다, 우는 습관을 고쳐라, 나약해져선 안 된다,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독해져야 한다. 그래서 독하게 살아봤다. 가족, 친구, 연애보다 성공, 명예, 일 욕심을 내며 살았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꼬박 그렇게 살았는데, 결과는 최악이었다. 남들은 내게 말했다. 그래도 실력이나 사회 경험에서 얻은 게 많지 않냐고.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빼곤 남는 게 없었다. 


건강은 나빠졌고 친구들과 멀어졌으며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생각과 행동들을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방법이 무엇이든 성공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명예가 얻고 싶었다. 나의 부모가 나에게 주지 않았던 것을, 나는 내 자식에게 주고 싶었다. 어린 어리석음이었다. 세상을 몰랐던 나는 결국 세상의 본모습에 주저앉았다.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돈이나 명예, 학벌, 소속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많았다.


한동안 방황했다. 수차례 이사를 하며 몸도 떠돌아다녔지만 마음은 그보다 몇 배 더 혼란스러웠다.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방황은 계속되었지만, 그 가운데 감사한 인연을 만났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생각이나 가치관, 행동 등 많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나의 어떤 모습도 인정해주는 태도였다. 그에게서 마음을 보호받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바로 세웠다. 한 번도 똑바로 서본 적 없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고, 종종 다시 쓰러지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았다.


'울어도 되는구나.'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멋지게 살 수 있구나.' 

'나는 감정을 멋있게 표현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눈으로 울어도 된다, 아니 그래야 살 수 있다



안구건조증이 심해졌다. 건조한 각막에 상처가 많이 생겨 화장을 하다가 우는 날도 있었다. 상처 난 각막 사이로 화장품이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엔 눈 화장을 잘하지 않는다.

지난여름에는 4달 동안 각막염을 달고 살았다. 안구건조증이 원인이었다. 동네 안과에서 스테로이드성 안약을 처방받았는데, 넣을 때만 멀쩡하고 스테로이드를 끊으면 다시 눈이 빨개지고 따가워졌다. 여러 안과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직장 동료의 소개로 종로에 유명한 공안과로 갔다. 의사는 내게 두 가지 안약을 줬다. 하나는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성 안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공눈물이었다. 기존에도 인공눈물을 처방받긴 했는데, 이번에는 그 양이 유독 많았다. 한 달이 넘도록 인공눈물을 꼬박꼬박 잘 넣었고, 그 사이에도 그 후로도 내 눈은 정상 상태를 유지했다.


눈에도 눈물이 필요했던 거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려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슬픈 일이 있어도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냥 눈물이 날 땐 눈물을 흘리는 게 맞았다.


나는 못난 사람이다. 몸은 약하고 정신은 더 약하다. 상처투성이라 조금만 센 자극이 오면 금세 주저앉아버린다. 그래서 많이 혼났고 외면도 받았다. 나이를 먹으며 외롭고 싶지 않아 괜찮은 척했다. 인정받고 싶어 내가 나를 외면했다. 그런데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문득문득 나를 노려보는 슬픔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나는 껍데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슬픔은 더 강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했고, 어쩌면 평생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행복했던 기억은 눈을 감을 때마다 조금씩 잊히는데, 어찌 슬픔은 눈을 감을수록 더 큰 몸뚱이로 나를 찾아오던지.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내 슬픔을 오롯이 여기에 묻어두고, 커진 슬픔에 가려져 있던 작은 행복을 꺼내어 이곳에 함께 남겨두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혹은 나중에 다른 이가 나의 삶을 추억할 때 작은 미소로 나를 묻어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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