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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Apr 29. 2019

가난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4


당신에게 500만 원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어떤 이에겐 하루 일당, 하루 매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한 달 동안 일한 대가로 받은 월급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돈으로 명품 매장에 들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방을 들고 나올 것이고, 또 누군가는 세계일주를 계획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 500만 원은 일 년 내내 모아야 겨우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큰 돈일 수도 있다.



내게 500만 원은 큰돈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 늘 꿈에 그리던 액수였다. 500만 원만 더 있으면 우리 가족은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 테고, 3년간 학원비를 낼 수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 후에 품었던 유학의 꿈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며, 서울에서 월세방을 계약할 수도 있었다.



나는 28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500만 원을 쥐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내 이름으로 된 월세계약서를 썼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조금씩 편안해졌던 건. 적은 돈이지만 차곡차곡 모아졌다. 동시에 당장 이사를 가야 하는 불안도 없어졌다. 그렇게 모으고 모아 조금씩 더 좋은 여건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 돈이 힘이 되어 남자 친구와 결혼을 준비할 수 있었고 둘만의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이 되던 해, 나는 내게 500만 원을 줄 수 없었던, 500만 원어치의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던 나의 부모와 여행을 계획했다. 그 예상경비가 딱 500만 원이었다.

  







가난이 만든 후유증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나와 나의 가족은 오랜 기간 가난의 늪에 허우적댔다. 돈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나가는 속도가 빨라, 아무리 아껴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노력했다. 두 오빠들은 20대 초반부터 쉬지 않고 일했고, 아빠는 지금의 엄마를 만난 후부터 열심히 돈을 모았다. 나 또한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되었다.

아빠는 말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이사 안 가도 되는 집이 있고, 자식들도 다 잘 커서 지 앞가림 지가 하는데 뭐 이거믄 충분하지.”



그런데, 가난이 만든 상처는 생각보다 그 후유증이 오래갔다.



노희경 작가가 쓴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낙타 그림이 뭔지 알아?
사막의 유목민들은 밤에 낙타를 나무에 묶어둬.

근데 아침에 끈을 풀어도
낙타는 도망가지 않아
나무에 끈이 묶인 밤을 기억하거든.

우리가 지닌 상처들이 기억하듯이
과거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얘기야."


잠시 지난 세 편의 글에 묻혀 뒀던 내 감정들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자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목표와 가능성을 ‘집안 사정’이라는 이유로 지레 포기하곤 했다. 사실 너무 귀찮았다. 어차피 안 해줄 건데 굳이 해서 뭐하겠어하는 생각들로 내 가능성을 내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돈이 된다면 했고, 해서는 안 될 일들도 돈을 벌기 위해 했다. 그렇다고 그리 큰돈을 번 것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푼돈에 목을 매었다. 1만 원이든, 2만 원이든 내게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순종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20대 초반에는 이런 생각도 했었다.

‘내가 조금만 예뻤더라면, 나는 원조교제도 할 것’이라고.


나는 내 시간과 맞바꿔 돈을 버는 삶이, 지긋지긋했다.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 더 많은 시간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나는 질투도 심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에게 질투를 느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더욱 심했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내가 더 똑똑한 것 같은데,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돈이 많다는 이유로 여유를 부리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처럼 살고 싶어 그들과 어울리며 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내가 가진 건 내 몸 하나밖에 없었다. 더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나를 내몰았다. 내 삶의 기준은 언제나 나보다 한 걸음 앞선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저 사람만큼, 저 사람만큼, 혹은 저 사람보다 앞에. 그리고 언제나 초조했고 불안했다. 나는 언제나 저 누군가의 뒤에 있었으니까.



막상 돈을 손에 쥐면 흥청망청 써버렸다. 남들이 사는 옷을 사고, 가방을 사고, 술을 마셨다. 정작 비싸고 좋은 것들은 손이 떨려 사지도 못했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나의 돈과 시간이 사라졌다. 다시 또 나는 가난이라는 나무 주변에서 빙빙 돌아야 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요즘, 한 걸음씩 나무 밖으로 걸음을 넓히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돈이 많아져서가 아니다.


2013년 12월 28일. 내 생애 처음으로, 진심으로. 겉과 속이 같은 모습으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 집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 집이 가난했던 건 가족이라는 믿음, 사랑, 혹은 응원 같은 것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자존감이 낮았다. 그래서 늘 가난했고 외로웠다.



가난의 진짜 고통은, 스스로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게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현실에 치이느라 가족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지고, 날카로워진다. 그 뾰족함이 결국 서로를 찌르고 만다.



나는 나라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무조건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사람을 만나고부터 ‘나’라는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비난했던 내가 조금씩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밀어붙였던 못된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자주 초조해지지만, 전에 비해선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스스로 느낀다.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것이 내게 맞는 부자의 조건이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가진 돈의 액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의 가능성을 믿기로 한 지금, 나는 부자가 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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