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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Dec 24. 2019

내가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우울증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6일 차다.


요즘 나는 깨어나기 8시간 전, 그러니까 보통 오전 8시에 눈을 뜨니까, 늦어도 밤 11시 혹은 11시 30분 즈음에 약을 먹는다.


'취침 전'이라고 쓰인 투명한 약봉지엔 3개의 알약이 들어 있다. 분홍빛을 띈 네모난 약과 그보다 작은 타원형 모양의 노란 약, 그리고 제일 작고 동그란 하얀 약이다. 미지근한 생수 반 잔에 약을 털어 넣는다. 혹여나 입 안에서 잠깐이라도 녹을까, 반 숨도 쉬지 않고 고개를 쳐들어 목구멍으로 약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바로 침대에 눕는다. 10분, 20분이 지나면 눈앞이 살짝 흐려지고 심장 안에 있던 모든 피가 온몸에 천천히 퍼지는 기분이 든다. 그때 잠에 들어야 한다. 몇 시간이고 침대에 뒤척이던 지난주를 떠올리면, 편안히 잠에 들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2주 전, 오랜만에 고향길에 나섰다. 수원역에서 출발하는 새마을호를 타면 3시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느긋하게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지난여름부터 읽다 말다를 반복하던 두꺼운 책을 펴고 자리에 앉아있는 데, 쓸 데 없는 생각들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무언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늘 그렇듯, 불안한 것이다. 늘 내 마음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늦가을의 낙엽처럼 흔들리고 꺼지고 부서진다. 


최근에는 그런 생각들이 자주 내 안에서 머문다. 연말이 되며 나이는 먹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목표도 없는 상태여서 더욱 그렇겠지. 그래도 특히 요즘엔 더욱 버티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다. 이젠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감마저 모조리 사라진 기분이다. 


지나가는 이의 짜증 섞인 말투에 상처 받고, 만원 지하철에서 나를 치고 지나가는(그래야만 지나갈 수 있음에도) 이의 안간힘에 온 화를 내게 된다. 남의 집 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누군가의 실없는 이야기에 발끈했다. 정말이지 타인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내가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지난 몇 달간 너무 내 아픈 기억만 생각하고 드러내고 사느라, 거기에만 너무 집중했나 보다. 내 몸에 닿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실눈을 뜨고 남을 째려보고, 흔적 없는 내 상처를 보듬기 바빴다. 갈수록 나의 마음은 좁아졌다. 이제 웬만한 사람들과는 이야기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형편없는 내가 다시 사회에 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살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겠지.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 나에겐 죽고 싶은 용기나 의지조차 없으니까. 


새마을호가 대전역에 도착했을 때쯤, 병원에 카톡을 보냈다. 


"다음 주 수요일로 예약을 잡아주세요."


수요일이면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라 괜찮아질 수도 있겠지만, 요즘 내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한 동안은 멀쩡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의사와 나의 대화는 전보다 간단했다. 나의 증상은 명백했다. 나는 그날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울고 말았으니까. 우린 모두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아닌 알을 먹는 생각보다 결심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그까짓 약이 머라고. 당장이라도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남들처럼 잠깐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잠에 들 수 있다면, 어떤 부작용이 오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약의 부작용보다 약을 먹지 않음으로 겪는 고통이 컸으니까.


한 가지 내 마음을 편하게 했던 건, 의사의 태도였다. 


"환자분한텐 지금의 마음 상태가 너무 힘들고 버겁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전문의로서 지금 환자분을 보면 아주 간단하고 쉬워요. 치료도 비교적 쉬운 병이고요."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만 마음을 고쳐먹어 약을 먹고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이 죽을 수도 없는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고마웠다.







그날로부터 5일간 밤마다 침대에 눕기 전 약을 먹었다. 아직까진 약간의 어지러움과 졸림, 두통이 느껴지지만 막연한 불안감은 없다. 밤마다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너무 감사하다. 


어제 다시 병원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약에 민감한 체질이라 천천히 약을 올리자고 한다. 지금 겪고 있는 부작용은 2주가량이면 대개 사라진다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짧게는 6개월, 보통 1년,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나 병원비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이게 내겐 최선이니까.


가끔 이런 생각은 든다. 


왜 나는 내 상처를 치료하겠다며,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까. 

만약 내가 내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고, 공모전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나의 힘든 기억이 진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만약 내가 그런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같은 것 말이다. 




Photo by Christopher Campbel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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