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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Aug 21. 2019

반짝반짝 빛나는 날

20190607

“낮에 ‘산골아이’ 읽었어, 도토리묵 나온 거.”

“느그 아부지는 책을 안 읽…(잠시 망설이시더니). 인자 본께 낮에 좀 보더라.”

어제 어르신 이야기책 11권을 엄마 아버지께 사다 드렸었다. 아버지가 안 보신다고 하면 내가 서운해할까 봐 괜히 둘러대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는,

“지금 나는 5권 갖다 놨어. 자기 전에 읽을라고.”

7,8년 전 나의 권유에도 쓰시지 않던 일기를 지난 3월 어느 날, 갑자기 파란 하늘을 보다가 내가 했던 말(일기 쓰세요 하는)이 생각나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는데, 지난 3월 18일부터 지금까지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시지 않고 쓰고 계신다. 심지어 가끔씩 색연필로 그림도 그려 넣으신다. 

“아침에 좀 잤고, 낮에 방죽 한 바퀴 돌았고, 집에 와서 밥 해 먹었고, 그니까 밤에 요놈(가져다 놓은 5권) 다 읽고 자도 돼.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하루 일과가 맘에 들고 기다려지고 적당히 바빴던 것 같다. 

“엄마, 학교 다시 다녀야 되는 거 아니야^^?”

“학교는 무슨...ㅎ 나는 네가 사준 책만 일고 일기만 써도 충분해. 내 맘으로는 좋은 글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도 들어. 재밌어.”

놀라웠다. 평소의 엄마 같았으면 돈 드니까 책 그만 사라고 하실 분인데, 내가 사 준 책을 계속 읽으시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다 읽으시면 소리 내서 읽어보고, 아버지한테 읽어도 드리고, 서로 역할극도 해보고, 번갈아 읽어도 보고, 필사도 해 보시고, 삽화도 모사해 보시고 다양하게 활용해 보시라 말씀드렸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재밌고 건강해졌나 싶어.”

일기를 쓰게 되면서, 몇십 년 만에 다시 책을 읽게 되면서 엄마의 삶이 달라졌다. 자기 전에 읽을 책을 옆에 쌓아두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고, 매일매일 일기 쓸 소재를 찾느라 사물을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일기와 책, 그 두 가지만으로도 목소리가 밝아졌고, 자식과 교회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 얘기가 화제의 대부분이었던 엄마의 대화에 나무, 왜가리, 꽃 하늘, 종달새, 민들레, 코딱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보시는 출판사 관계자님이 있다면, 작은 글씨의 책을 읽기 벅찬 어르신들을 위해 큰 글씨 책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팔순 엄마의 삶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위 사진 : 엄마가 4월 30일 일기에 직접 그리신 그림


사드린 큰 글자 책 중 하나인 '가난한 날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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