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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비튬 Mar 05. 2022

기나긴 터널의 끝자락에서

전일제 대학원생의 졸업 이야기 #1

지난달 중순,

기대하지도 않았던 저널에서 메일이 날아왔다. 짤막한 메일에서 눈에 띄는 한 글자는 바로 "accept". 드디어 내 논문이 통과된 것이다. 생명과학계열 대학원생으로 저널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 점수인 impact factor 5점을 넘기 위한 여정은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 9년 차 대학원생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졸업은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제 졸업의 'ㅈ'자가 보이는 듯하다.



9년이면, 8살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중학교 3학년이 되는 과정이다.

이 긴 세월 대학원에 있을 줄 알았으면, 안 왔다. 늦어도 6년 안에 석 박통합 과정을 졸업하고 해외로 포닥 과정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6년이 아닌 9년째 실험실에 있으며, 아직 졸업 확정도 아니다. 물론 첫 번째 논문의 통과로 슬슬 졸업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뭐 교수님들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만) 혼자 헤쳐나가고 있다.








오늘은 accept 논문의 게재료를 내 카드로 긁은 날이다. 토요일이라 실험실에는 아무도 없고, 토익공부를 위해 혼자 나와있다. 그러다 혹시 놓친 메일이 있을까 해서 교수님의 계정으로 메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한 2일 전 메일을 찾았고,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카드 결제창이 나왔다.



보통의 논문 게재료는 실험실이 가지고 있는 연구비에서 해결하지만, 우리 실험실은 빚이 어마어마한 깡통 실험실. 나를 마지막으로 아마 문을 닫게 될 실험실이기에, 연구비가 끊긴 지 오래되었다. 교수님 또한 연구에 큰 관심이 없으시고, 내 졸업도 알아서 하라며 본인 메일 계정 비밀번호를 던져주는 분이라 결국 논문 게재료도 내 몫이다. 



사실 내 몫이라고 하기엔 난 가진 게 없으니, 나를 부양하고 있는 보호자들의 몫이라는 표현이 맞는 듯하다. 중간에 그만둘까도 수십 번 생각했지만, 보호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스스로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일단 내 카드로 긁고 보호자 1에게 연락했다. 논문 게재료가 자그마치 $1,870이 나왔다고, 약 227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보호자 1은 나에게 바로 230만 원의 돈을 보내주고 힘든 티를 냈다. 그러고는 퇴근길에 근처 육회 맛집에서 포장 해오라는 230만 원어치의 심부름 값을 내려주었다. 퇴근길에 거기 들렸다 집에 가면 은근히 돌아가야 하는데 입이 삐죽 나오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자는 의사 표현의 자유가 없다.



보호자 1이 어려움을 토했으니, 이제 보호자 2한테 앞으로 나의 박사과정 마무리 경제적 지원을 부탁해야겠다. 진짜 이놈의 박사학위는 정말 징글징글하다. 학위가 있다 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고난이 많은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논문 2의 accept과 5학기가 지나 다시 해야 하는 공개발표, 그리고 졸업논문과 디펜스가 남았다. 중간에 영어시험(토익 대체)도 있고... 



갑작스러운 졸업 준비가 기쁘면서도 머리가 아프다. 과연 나는 박사학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졸업하면 물박사가 되는 건 아닐까.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해 먹고살아야 하는가.



30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까지 이런 고민을 할 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 너무너무 늘어진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이렇게 늘어지는지 진지하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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