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이야기인가, 역사인가

그리스 신화와 단군신화

by 한량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 중에 S본부에서 하던 ‘올림포스 가디언’이 있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만화였는데, 지금 봐도 꽤 교육적이고 재밌는 만화이다.

그리스ㆍ로마 신화는 우리에게 꽤 친숙하다.

언젠가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강의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로 신화 속 인물들을 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테나’, ‘제우스’는 먼 신이 아니라 게임 속 동료나 보스였다. 요즘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신화의 세계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괜히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1. 그리스 신화, 그리고 로마의 수용

엄밀히 말하자면 ‘올림포스의 이야기’는 그리스의 이야기다. 로마에는 처음부터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인격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았따. 로마인들이 믿은 것은 사물이나 장소에 깃든 비인격적인 힘, 즉 ‘누멘(numen)’이었다. 누멘은 모든 현상에 스며 있는 일종의 ‘신령한 힘’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건설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로마는 그리스 신화 체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재창조했다. 이른바 ‘그리스ㆍ로마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신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제우스는 유피테르, 헤라는 유노, 아테나는 미네르바, 아레스는 마르스, 아프로디테는 비너스, 헤르메스는 메르쿠리우스로 불렸다.

2. 신화의 이름, 일상 속의 상징

이 신들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Athens)’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서 비롯되었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와 사유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2권 6장에 따르면,

원래 미네르바의 새는 까마귀였는데,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그 자리를 부엉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 19세기 독일 역사ㆍ철학자 헤겔이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년) 서문에 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을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졌다. 즉, 철학은 현실이 다 지나간 뒤에 비로소 이해된다는 뜻이다.

한편, 우리가 피곤하거나 술 마신 다음 날 찾는 박카스D의 ‘박카스(Bacchus)’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이름이다.

태양계의 왕자라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Jupiter)’역시 제우스의 로마식 이름인 ‘주피터’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신화의 언어는 여전히 우리의 언어와 삶 속에 숨 쉬고 있다.


3. 인간과 닮은 신들

그리스 신화 속 12신은 먼 하늘 위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가장 닮은 모습을 한, 인간적인 신들이었다. 그들은 질투하고, 사랑하고, 다투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조각, 회화, 문학, 영화, 게임 등 그 어디에서든 우리는 여전히 신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외국 신화’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온다.


4. 우리의 신화, 단군 이야기

그리스 신화를 말했으니,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보자.

어떤 나라가 건국되면 그 나라에는 건국 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로마가 제국을 세우며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였듯, 우리에게도 국가의 기원을 상징하는 신화가 있다.

그 대표적 이야기가 바로 단군신화다.


단군왕검은 누구일까?

간절한 소망으로 인간이 된 웅녀(熊女)와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

그가 바로 고조선의 건국자로 알려진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5. 단군의 이름과 의미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었다. ‘단군’은 몽골어 Tengri(텡그리), 터키어 Tangri에서 비롯된 말로, ‘신’을 뜻한다.

이 말은 우리말의 ‘당골’, ‘단골’로 변형되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람’ 즉 무당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당을 ‘당골네’라고 부르는 것이다.

‘왕검’은 무력을 가진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

즉, ‘단군(제사장)’+ ‘왕검(군장)’이라는 이름은

고조선이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이 합쳐진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6. 신화 속 이야기, 역사 속 해석

단군신화를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상징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장면은 당시 여러 부족이 서로 다른 토템(동물신)을 숭배하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결국 곰을 숭배하던 부족이 하늘을 섬기던 환웅 부족과 결합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결합의 결과물이 바로 고조선의 건국이다.

이런 해석에 상상력을 더해 만든 드라마가 바로 ‘태왕사신기’다.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상징이 절묘하게 뒤섞인 작품이었다.


7. 그리스 신화와 단군신화의 차이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격화된 존재였다. 그들은 인간의 세계를 내려다보며, 때로는 인간의 오만을 벌했다. 신들은 인간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경계했다. 그리스의 영웅들은 신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언제나 신에게 도전했고, 그 도전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이 영웅들의 모험담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경쟁과 연합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면, 단군신화의 중심인 환웅은 달랐다. 그는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이 아니라, 직접 인간 세계로 내려와 그들과 함께 살며 다스렸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 정신은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만든다는 사상이다. 그리스의 제우스가 여러 영웅을 낳았던 것과 달리, 환웅은 오직 하나의 인물, 단군왕검을 남겼다. 단군은 아버지 환웅이 닦은 터전 위에서 하나의 국가, 고조선을 세웠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이어진 이 계보는 신화와 역사가 맞닿은 지점이었다.


8. 신화, 이야기인가, 역사인가

그렇다면 신화는 단지 ‘상상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역사적 사실의 다른 얼굴’일까?

단군신화를 포함한 많은 신화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 정치 질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신화 속에는 ‘신’이 있지만, 그 신을 만든 것은 ‘인간’이었다.

결국, 신화는 역사를 전하는 또 다른 언어인 셈이었다.


9. 덧붙여 — 유럽과 아시아의 신화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비교를 하나 덧붙여보자. 그리스ㆍ로마 신화는 단지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후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철학은 그리스 정신을 다시 불러냈고, 오늘날 유럽 연합의 문화적 기반도 그리스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시아에도 물론 ‘중화문명’이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국, 일본, 베트남, 중국 등은 각각의 신화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공유된 문화가 있지만, ‘하나의 신화’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왜 유럽은 신화를 공유하며 연합을 꿈꾸었고, 동아시아는 공존 속 분화를 택했을까?

이 문제는 언젠가 다시 깊이 있게 다뤄볼 흥미로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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