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서원의 기원을 찾아서

① 황실 도서관에서 성리학 산실까지, 중국 서원 이야기

by 한량

프롤로그 ― 서원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일종의 외래 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2년(중종 38)에 완성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떻게 중국에서 시작된 서원이 조선에 들어와 정착할 수 있었을까. 이 서원은 갑자기 뜬금없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렇게 등장했던 것일까.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왕조 기록에 ‘서원’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42년이 아니라, 약 124년이나 앞선 시기인 1418년이라는 점이다.

(상략) 더구나 향교의 생도(生徒)는 비록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있더라도, 있는 곳의 수령이 서역(書役)을 나누어 맡기고 빈객(賓客)을 응대하는 등, 일에 일정한 때가 없이, 使役하여 학업을 폐하게 하니, 지금부터는 일절 이를 금지하고, 그 유사(儒士)들이 사사로이 서원(書院)을 설치하여, 생도를 가르친 자가 있으면, 위에 아뢰어 포상하게 할 것이다(<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기유.).


위 인용 문단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년(1418) 11월 기사의 일부로, 국왕이 6조(六曹) 관리들과 지방 관리들에게 내린 유시(諭示: 국왕이 관리들에게 내린 지시 문서)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구절이 바로 “지방 유사가 사사로이 서원을 설치”하였다는 부분이다. 이때 지방 유사는 지방 양반으로 이해하면 된다.

실제로 세종의 지시가 있고 나서 각도의 관찰사는 자신들이 관리하던 지역의 효자, 효부 등의 명단을 조사하여 올리는 상소에 서원을 설치한 사람들을 함께 기록하여 올렸다. 김제에 살던 전 교수관 정곤(鄭坤), 평안도 함종현에 살던 행원 강우량(姜友諒)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원을 설치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도(敎導) 등 교육과 관련된 종9품 관직을 하사받았다(<세종실록> 7권, 2년, 1월 21일 경신; �세종실록� 9권, 2년, 9월 24일 기축.).


이렇게 최초 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보다 124년이 앞선 때에 ‘서원’이 있었지만, 이 서원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몇몇 교육사 연구자들은 이 서원을 제향 공간을 갖추고 있던 소수서원과 구별하고, 서당ㆍ정사ㆍ서재 등과 같은 사학 기구였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종 즉위년 유시에 등장한 서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서원은 본래 제향 공간을 갖추지 않은 사설 교육 기구였기 때문이다.


교육기구 서원 ― 본래의 의미 되짚기


1. 황실 도서관에서 집현전으로: 여정수서원의 변신


서원은 원래 당나라 현종 때 처음 등장했다. 중국 문헌 중에 서원이란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곳은 <신당서(新唐書)>「百官志」로 여정수서원(麗正脩書院)이란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서원은 718년(당나라 현종 개원 6)에 궁실 내부에 설치한 기구로 경서를 보관하고 문서를 교감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약 7년 뒤인 725년(개원 13)에 여정수서원은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도서관 업무 이외에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하고 정책을 자문하는 기구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우리나라 세종 때 건립된 집현전과 유사한 기구이다.


2. 전란의 시대, 학문 연구 기구가 되다: 당말·오대의 서원


황실 도서관 겸 자문 기구 역할을 했던 서원이 민간으로 나온 시기는 ‘당송 교체 시기’였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때 중 한 시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서원은 개인의 학문 수양 장소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때는 안사(安史)의 난(亂)[755~763]’을 기점으로 당나라 말기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웠으며, 중원에는 한족이 아닌, 오랑캐 이민족들이 각각 나라를 세우고 전란을 벌이던 5대 10국 시기였다.

당나라 지식인들은 혼란을 피해 산림으로 은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불교 사원이나 경관이 수려한 곳을 선택해서 서당, 서옥, 정사 그리고 서원 등을 건립하고 개인 강학 장소로 활용하거나 시문을 읊고 학문 연구 장소로 활용했다. 여기에 5대 시기에 각 왕조는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관학을 대신하기 위해 당나라 지식인들이 건립한 개인 서원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여산국학(廬山國學)이다. 그리고 이 여산국학이 바로 소수서원의 모티브가 된 주희(朱熹, 1130~1200, 이하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다.

남송학자 주자가 작성한 「백록동부(白鹿洞賦)」라는 기록에 따르면 여산국학은 당나라 덕종 정원연간[貞元年間, 785~795]에 이발(李渤, 773~831)이라는 학자가 건립한 개인 서원이었다. 오대 시기 국가 중 하나였던 남당(南唐) 정부는 여산에 있던 이발의 개인 서원을 복원하여 국자감(國子監) 소속인 구경박사(九經博士) 이선도를 동주(洞主)로 파견하고, 학전(學田: 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국자감 교육 과정과 유사한 형태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3. 사대부·과거제와 서원 복원운동: 송대의 선택


이렇게 중국 정부는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사학 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런 정책 기조는 왕조가 바뀐 후인 송나라 정부 때까지 이어졌다. 귀족 중심 사회였던 당나라와 비교했을 때, 송나라에서 가장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대부(士大夫)의 등장과 능력에 따른 시험제도인 과거제도 등장이다. 혼란했던 여러 왕조를 정벌하여 통일 국가를 이룬 송나라 정부는 기존의 귀족들과 다른 새로운 인재를 중심으로 관료제도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관료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도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과거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지방 교육을 진흥해야 하는데, 전쟁이 막 종결된 상황에서 새로운 교육 기구를 건설하기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므로 송나라 초기 정부가 생각한 것이 바로 당나라 말기에 건립되었던 개인 서원을 복원하여 관학을 대체할 기구로 만드는 일이었다.

송나라 정부의 정책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비롯한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들의 이해와 잘 맞아떨어졌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사대부들은 기존의 유학 체제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학문 연구를 하였는데, 그렇게 등장한 학문이 바로 신유학(新儒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성리학이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학문을 더욱 체계화하여 보급하기 위한 장소로 서원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송나라 시기 서원복원 운동이 사대부들 중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 초기 송나라 황제들은 사액(賜額)과 학전(學田) 지급 등을 통해 그들의 서원 복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중국의 서원복원 운동이 최절정기에 이르렀던 때는 남송 시기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신유학자들의 대표인 주자가 있었다. 주자를 비롯한 강남 지역에 거주하던 신유학자들은 선진제자(先秦諸子)의 자유로운 토론 및 변론 활동, 한나라 시기의 태학과 개인의 정사를 통한 경전 연구 및 문인 양성의 전통을 계승하여, 이런 것들을 서원을 통해 발현하고자 했다. 신유학자들은 단순히 서원 건물을 복원하는 것에서 나아가 교육 방법과 지켜야 할 규범 등을 작성하여 하나의 제도로 정립하고자 했다. 그중에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주자가 작성한 「백록동서원 학규」이다.


4. 원·명·청의 서원 통제, 부흥, 그리고 탄압

송나라 사대부들의 성리학 보급처로서 지방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서원은 원나라 왕조가 들어서면서 조금 변화를 겪는다. 원나라 정부는 서원에 직접 산장(山長=원장)을 파견하고, 서원을 과거를 위한 인재 선별 장소로 활용하고자 했다. 원나라 정부가 국가가 직접 서원을 경영하려던 이유는 새로운 왕조에서 살아남은 남송의 유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런 비슷한 정책은 청나라 왕조 때도 보인다. 청나라는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여, 서원은 경영하도록 했다. 이런 정책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 왕조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원나라와 청나라 시기를 빼면, 한족 통치 시기는 명나라 때이다. 명나라에서는 송나라와 유사하게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서원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라는 유학자가 있다. 왕수인은 문인을 모아 서원을 통해 강회(講會)를 개최하여 서원 교육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그 결과 서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문 계보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명나라 시기에 약 1500~2000여 개소 이상의 서원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정부는 서원을 통해 학파가 형성되면서, 개인의 서원이 관학의 권위를 넘어설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오자, 서원 부흥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므로 가정ㆍ만력 연간에는 서원이 정부를 비판하는 반정부 세력이란 이유로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사실 명나라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송나라 때도 성리학 금지 정책이 펼쳐지기도 했다.


중국 서원 역사를 간략하게 개괄해 본 것은 중국의 서원 정책 역사가 우리나라 서원 정책 역사와 미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서원 역사는 어떠했을까. 그 출발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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