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인의 노래

삶이 담긴 헌책방삶이 담긴 헌책방

by 김준호

책방 안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 허름한 차림의 노인 한 분이 한 손에 보자기를 들고 "계세요?"라며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보기에도 보자기에는 책이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책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이 책들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노인이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보자기를 풀자 오래된 시집들이 나타났다. 누렇게 바랜 표지, 낡은 장정이었지만 정성스럽게 보관된 흔적이 역력했다.


"팔려고 오신 건가요?"


"아니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드리려고요."


나는 손을 멈췄다. 헌책방을 하면서 책을 기증하러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기증을요?"


"네. 큰아들 집으로 옮겨 오면서 다른 책들은 아들 내외가 모두 처분했는데, 이것들만은 제게 소중한 것이라 따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을 읽기 힘들어졌네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때가 되어서요."


노인이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1950년대 판본이었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이 책은 제가 스무 살 때 샀습니다. 헌책방에서요. 그때도 이미 오래된 책이었죠."

표지를 쓰다듬는 손끝이 떨렸다

.

"이건 김소월 《진달래꽃》. 1960년대 판이고요."


한 권 한 권 꺼낼 때마다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이건..."


얇은 시집 한 권. 손때 묻은 표지.


"제가 쓴 겁니다. 1975년에 자비로 200부 찍었어요.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몇 권은 헌책방에 맡기고. 이게 마지막 남은 거예요."


나는 그 시집을 받아 들었다. 표지에 손 글씨로 쓴 제목.


'가을 언덕에서'.


"시인이시군요."


"시인이라기보다는 시를 좋아했고 시 쓰기를 좋아했죠. 등단을 못했으니 정식 시인이라 하기는 쑥스럽습니다."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더 이상 시도 못 읽고 쓰지도 못하게 됐네요."


"왜요?"


"초기 치매 진단을 받았어요. 석 달 전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괜찮았어요. 가끔 깜빡하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노인이 시집을 내려다봤다.


"글자가 안 읽혀요. 아니, 읽히는데 의미가 안 들어와요. 제가 평생 사랑했던 시들인데, 제가 쓴 시조 차도."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나는 노인이 눈물을 보이는 것을 외면했다.

아니, 나도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점점 더 심해질 거라고. 언젠가는 이 시집들이 뭔지도 모를 거라고."


"그래서..."


"네. 그래서 제가 아직 판단할 수 있을 때 결정하고 싶었어요. 이 책들을 어떻게 할지."


노인이 나를 봤다.


"집에 두면 그냥 쌓여만 있을 겁니다. 제가 못 읽는데 누가 읽겠어요. 자식들도 시엔 관심 없고. 차라리 여기 두고 가면 누군가 읽지 않을까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와서 이 책들을 집어 들고 읽어주면..."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못 읽어도 누군가는 읽는 거잖아요. 그럼 이 시들은 살아있는 거고."

나는 시집들을 천천히 살폈다. 윤동주, 김소월. 그리고 이름 없는 시인들의 자비 출판 시집들. 어떤 것은 표지가 떨어져 나갔고, 어떤 것은 페이지가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모두 정성스럽게 보관된 흔적이 있었다.


"이 책들... 정말 귀한 겁니다."


"윤동주 이 판본도 희귀합니다."


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 방에 쌓여서 먼지만 쌓이는 것보다 여기서 누군가 손에 들리는 게 낫습니다."

나는 노인의 시집을 다시 펼쳤다. '가을 언덕에서'.

첫 페이지에 시 한 편이 있었다.


가을 언덕에 서서 바람을 맞는다.

고향 떠나 이역 멀리 낯선 하늘 아래를 헤매다 이제 온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는 떠나지 않는다는 다짐 하며 시가 되어 내 안에 남는다

나는 듣는다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천천히 시를 읽었다.


"좋은 시입니다."


"옛날 시죠. 50년 전에 쓴 거예요."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이제 이런 시도 못 씁니다. 쓰려고 하면 단어가 안 떠올라요. 떠올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르신..."


내가 말했다.


"이 시집들,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오시면 권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나는 '가을 언덕에서'를 들어 올렸다.


"이건 돌려드려도 될까요? 읽지 못하셔도 곁에 두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쓴 시잖아요."


노인이 시집을 바라봤다.


"글자는 안 읽혀도 이 책이 뭔지는 아실 겁니다. 손에 쥐면 느낌이 올 거고요."


"아닙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받아 주세요. 제가 들고 있으면 슬플 것 같아요. 쓸 수 없는 시인이 시집을 들고 있는 게. 차라리 여기 두고 누군가 읽어주는 게 낫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빈 보자기를 접었다. 가벼워진 손.


"한결 가벼워지네요."


가벼워 진건 보자기가 아니라 노인의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섰다.


"혹시... 나중에 제가 다시 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기억은 못 할 겁니다. 이 책들을 뒀다는 것도, 선생님 얼굴도. 그래도 시집은 알아볼 것 같아요. 손에 쥐면."


"언제든 오세요. 여기 있을 겁니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시집들을 바라보고 문을 나섰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 뒷모습을 봤다. 빈 보자기를 든 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책상 위의 '가을 언덕에서'를 다시 펼쳤다.


나는 듣는다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시인은 이제 시를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쓴 시는 여기 남아 있다. 누군가 이 시집을 집어 들 것이고, 읽을 것이다. 그때 시인은 기억하지 못해도 시는 기억될 것이다.

나는 시집들을 조심스럽게 서가에 꽂았다. 특별한 자리, 시 코너의 가장 앞쪽. 누군가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햇살이 시집 표지를 비췄다. 60년 된 시집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전히 살아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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