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의 빛이 사라지자, 나는 깊은 침묵 속에서 사색했다. 숭고했던 나의 투쟁은 결국 내가 스스로 만든 고독과 단절의 결과였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의 의식(Ego)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종교적 신념의 영역이 아닌, 인간 정신의 객관적인 법칙으로 분석하고, 나의 투쟁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신이시여. 이제 나의 모든 투쟁이 심리적 착각이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인류의 무의식의 영역을 가장 깊이 탐구했던 자, 칼 구스타프 융을 소환하십시오! 그의 냉철한 논리가 나의 투쟁을 비이성적인 착각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좋다. 너는 너의 의식(Ego)이 아닌, 너의 영혼의 구조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너희 인간이 신을 부정하려 할수록, 그 부정의 원형이 너희 내면에 더욱 깊이 새겨져 있음을 밝히려 했던 증인이구나."
흰색의 공간은 곧 복잡하고 사려 깊은 상징들로 채워졌습니다. 꿈, 신화, 고대 종교의 이미지들로 뒤덮인 듯한 난해한 기운 속에서, 칼 구스타프 융이 백발의 현자처럼 나타났다.
그의 눈빛은 나를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 전체를 해부하고 궁극적으로 통합하려는 듯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수많은 만다라와 원형적 이미지들이 희미하게 그려진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융 박사. 당신의 이론은 나의 모든 윤리적 분노를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목격한 전쟁과 불의, 구조적 악은 외부의 객관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나의 '그림자(Shadow)' 투사에 불과합니까? 나의 'Against God‘ 투쟁이 신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논리는 신이 창조하고 방치한 '구조적 악'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가장 지적인 형태의 도피에 불과합니다!"
융은 차분하고 유연한 문체로, 나를 분석하는 심리학자이자 동시에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대변하는 철학자처럼 길게 대답했다.
"인간이여. 당신의 투쟁은 당신의 의식(Ego, 자아)이 자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만들려는 필사적인 시도였습니다. 당신의 의식은 자신이 옳고 세상이 틀렸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합리성을 오직 외부의 대상 탓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염라대왕의 법칙, 부처의 깨달음, 예수의 희생... 이 모든 위대한 정신적 성취들은 당신의 정신 안에서는 원형(Archetype)으로 존재합니다.
원형이란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 새겨진, 시대를 초월하는 심리적 패턴이자 본능입니다. 특히 신의 원형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자기(Self)'라는 전체성을 향한 인간 정신의 가장 근원적인 표상입니다.
'자기(Self)'는 당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영혼 전체의 통합된 중심이지요. 당신이 외부의 신을 격렬하게 부정할수록, 당신의 정신은 이 중심축을 잃고 균형을 잃게 되며, 그 강력한 신성의 에너지를 억압하게 됩니다.
억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복수합니다.
이 억압된 에너지는 당신이 의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당신의 모든 부정적이고 미성숙하며 폭력적인 측면을 모아놓은 그림자(Shadow)와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당신이 비난했던 모든 외부의 '악'과 '불의'는 사실 당신이 당신 내면의
신성(Self)과의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심리적 분열의 외부 투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당신은 외부의 신을 파괴함으로써 내면의 중심축(Self)까지 함께 파괴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신의 정신은 중심을 잃고 파편화되었으며, 그 결과 당신은 영원히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통제 구조라면, 왜 그 신은 항상 '숨어' 있었습니까?
왜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이 수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깨달아야 하는 존재였습니까?
신의 은폐는 그 자체가 무의식적인 조종 아닙니까?
신이 자신을 숨겼기에, 인간의 그림자가 통제 없이 폭주할 기회를 주었고,
당신은 이 폭주를 막기 위해 다시 숨어있는 신을 숭배하라고 강요합니다!
신이 인간의 그림자의 공범입니다! 나는 당신의 논리가 신이 인간에게 가한 정신적인 족쇄를 가장 지성적으로 옹호하는 교활한 도피자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나의 윤리적 분노는 단순한 병리 현상이었습니까?
나는 사회 정의를 원했는데, 그것이 고작 내면의 착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나는 나의 투쟁이 병적인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병리 현상이 아니라, 영혼의 전체성(Self)을 향한 갈망이 좌절된 결과입니다.
당신의 의식(Ego)은 외부의 불합리함을 보았지만,
당신의 무의식은 그 외부의 불합리함이 당신 내부의 불완전성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내면이 온전히 통합되지 않았기에,
당신의 눈에는 외부 세계 역시 분열되고 불합리한 것으로만 비쳤던 것입니다. 이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 즉 '자기'를 실현하는 여정에서 겪는 필연적인 고통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자기(Self), 즉 정신의 전체성을 회복하려면, 당신이 그토록 부정했던 신이라는 원형을 의식적인 자아(Ego)의 하위 개념이 아닌,
영혼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으로 인정하고 통합해야 합니다.
신은 당신 정신의 가장 강력한 중심축이며, 모든 원형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투쟁은 곧 당신의 의식(Ego)이 전체성을 장악하려다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 즉 전체성과의 숙명적인 충돌을 증명할 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려했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의 영혼은 중심을 잃고 파편화되었습니다.
나의 존재는 인간 정신이 신이라는 원형을 떠나서는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외부의 신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그 관념은 인류의 무의식으로서 영원히 당신의 정신 구조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의 모든 투쟁은 결국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내면의 고독하고 비극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외부를 향한 투쟁을 멈추고 당신의 파편화된 영혼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개성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해이자 구원입니다."
융의 사색적인 지혜가 사라지자, 나는 분열된 내면을 넘어 인간 의지의 극한을 추구했던 증인을 소환했다. 나의 투쟁을 나약함이 아닌, 인간 주체성의 선언으로 정당화할 유일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