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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Aug 29. 2023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공황발작이 왔다

#치앙마이 일년살기

공황발작의 전조증상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스트레스가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때로는 강박적으로 상황을 곱씹는 편이다. 최근 한 달도 그랬다. 가족과 회사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내가 가족과 회사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머릿속에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누워있기만 하거나 술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때마침 전세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고 몇 주 정도는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팽팽한 실이 툭 하고 끊어지듯 퇴사를 결심했고, 그렇다면 이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앙마이에서 일 년을 살고 오겠노라 마음을 먹어버렸다. 치앙마이에서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할 요량이었다. 이것이 꼬여버린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지난 10년간 태국 한 달 살기는 다섯 번 정도 했고 작년에는 회사에 다니며 워케이션으로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하기도 했다. 익숙한 곳, 새로움도 없겠지만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 생각해 치앙마이의 생활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한국의 생활을 정리하는 것, 이를테면 쓸만한 모든 물건을 당근을 통해 판매하거나 나눔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모든 짐은 32인치 캐리어, 20인치 캐리어에 대-충 담아 치앙마이에 도착한 길이었다. 외국이 아니라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일 년을 살 집을 구해야 하기에 하루에 이만보씩 걸어가며 여러 집을 보러 다녔고 생각보다 쉽지 않아 벌써 5일째 싸구려 호텔에 계속 숙박을 하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전에는 잘 몰랐던 지역의 길도 속속들이 알게 되어서 몸은 힘들지만 보람차다고 생각했지만 걷는 도중에도 나는 과거의 고통을 계속 곱씹었다.


특히 부모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부모님을 만나지 않은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퇴사하고 치앙마이에 온 것도 당연히 알리지 않았다.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올 거고 '적어도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집에 오라든가 음식을 했으니 내가 사는 오피스텔 경비실에 맡기고 가겠다는 연락이 올게 뻔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심장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내가 부모님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너무도 죄책감을 느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밤에는 맥주를 두 캔 정도를 마셔야 잠에 들 수 있었고 다음날 컨디션이 좋을 수 없었다. 


그렇게 치앙마이 5일 차, 밤늦은 시간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부정적인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30대 후반을 향해 나아가는 나이에 미혼 여성에, 가족과 연락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로 폭식하다가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었고, 퇴사도 했으며, 한국에 집도 없고, 태국에서도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망했다. 내 인생은 끝이다.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나는 죽을 것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감정은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기만 했다. 오른쪽 허벅지에서는 계속 경련이 일어났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고 발작이 일어난 당시에는 이 공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죽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나에게 강제되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니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손을 벌벌 떨면서 유튜브로 공황장애, 공황발작, 두려움 이겨내기 등 온갖 키워드를 찾아 검색했고 심호흡법을 따라 하거나 명상의 문구를 따라 읽기도 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나에게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죽더라도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엉엉 울고, 심호흡하고, 화내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법처럼 공포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후폭풍이 심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은 공포에 이러다 타국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와 공황장애 치료는 어디서 해야 하는지까지 알아보고 비행기표를 사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죽기는 싫었나 보다. 치료받을 생각부터 한 거 보면...)


그 사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카톡으로 상황을 알렸고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친구가 새벽시간임에도 연락을 해줘서 친구와 대화를 하며 당장 귀국행 비행기표를 사는 극단적인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이 호기롭게 퇴사하고 치앙마이에 와서 5일 차에 내가 마주한 상황이다. 


그래서 치앙마이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는 모든 계획은 일단 내려놓았다. 계획이 너무 많긴 했다. 태국어도 배우고 영어도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쓸 생각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회사 생활할 때보다 더 바쁜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었던 공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 이후, 나의 모든 행동은 이런 공포를 다시는 겪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대체 누가 치앙마이까지 와서 이럴까. 다들 열심히 치앙마이에서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알리는 글을 쓰고 유튜브 영상을 찍느라 바쁜데. 나 역시도 맛집 소개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했지만 적어도 치앙마이의 여유로움을 십분 활용하는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는 했었다. '치앙마이에서의 일 년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와 같은 꽤나 멋진 문구도 생각해 두었고.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나는 방향을 틀어 나를 들여다보는 글을 쓰기로 했다. 살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불안장애, 공황장애를 이겨내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하니까.


학교 다닐 때 전공이 신문방송학이었고, 영화 학회에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제목의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내용은 여주인공이 외국인과 연애하는 내용이었나 그랬을 텐데 이 제목만큼은 잊을 수 없었고 특히 지금 그러하다. 


치앙마이에서 내 영혼은 고국에서부터 따라온 불안에 잠식될까.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치앙마이에서의 첫 번째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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