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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l 04. 2024

완벽함이라는 장애물

#치앙마이 일년살기

요즘 들어서 내가 다니는 무에타이 체육관 코치들이 나에게 스파링을 자주 시키는 중이다. 


몸이란 것이 참 이상해서 몇 주 전에는 수업이 끝나면 지쳐서 스파링을 하자는 제의를 거절했는데 이번주는 또 괜찮은 거라, 빼지 않고 이틀 연속으로 스파링에 참여했다. 


스파링이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상대는 다들 남자들이고 나 혼자 여자라서 나는 일방적으로 줘 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머나먼 타국에서 돈을 내고 일부러 덩치 큰 남자들에게 얻어 터지는 중이다.


무에타이 같은 격투기의 경우 기술도 기술이지만 체력과 체급이 매우 중요한 요소다. 무에타이는 특히 체력소모가 심하고 거친 운동이라, 스물다섯 살이 된 코치도 '나 이제 늙어서 시합 못 뛰어'라고 말한다. 나는 체력은 당연히 남자분들에 비해서 바닥인데 체급이 높은 편이라(?!) 어째 저째 스파링에 참여해서 잽이라도 뻗어보는 편이다. 


체육관에 키는 180cm쯤에 허리에 군살 하나 없고 다리도 길어서 보고만 있어도 몸이 근사하게 생겼다고 느껴지는 어린 선수 겸 코치가 한 명 있다.(아마 20대 초반?) 내 키는 고작 167cm인지라 이 친구와 스파링을 하면 코치는 아주 쉽게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나를 갖고 논다. 오늘도 뭘 좀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3라운드 정도 스파링을 하고 완전히 뻗어서 다른 사람들의 스파링을 구경했다. 오늘은 평소 스파링에 참여하지 않던 태국인 남성이 거의 처음으로 스파링에 참여했다. 그런데, 와,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거라. 자세는 엉망인데 잘 보고 있다가 킥이나 펀치를 굉장히 빠르게 꽂아 넣었다. 나와 스파링을 했던 코치와의 스파링이었는데 나와 할 때는 장난치듯 웃고 있던 코치가 여러 번 킥과 펀치를 허용하자 점점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초보자들과의 스파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고급 킥 기술까지 써가며 자존심을 세웠다. 


남자라서 그런 건가 어려서 체력이 좋아서 그런 건가 체급이 좋아서 그런 건가. 무에타이 초보임에도 스파링을 꽤나 근사하게 해내는 것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무에타이를 잘하게 되는 방법은 없으니 그냥 열심히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고 스파링을 하기 전에 코치들이 미얀마인 친구에게도 '스파링 할래?'라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아니,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라고 거절하는 것을 듣고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내가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무에타이를 열심히 하지 않았었다. 


준비가 되는 시기 같은 건 없는 건데. 일단 해야 느는 건데. 


사실 이번에 치앙마이에 도착해서도 초반에는 스파링을 안 한다고 몸을 사렸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코치들이 나를 살살 꼬셔가며 스파링을 시켜서 하다 보니 꽤나 실력이 많이 늘게 된 것이다. 코치들은 처음에는 '아, 이거 스파링 아니고 기술 연습이야'라고 해놓고 나를 링 위로 불러서 정신도 차릴 수 없게 킥과 펀치를 날리며 스파링을 해주었다. 처음에 할 때는 하도 맞아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몇 달을 계속 맞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맞는 것이 조금은 덜 두려워지기 시작하고 나도 한 두 번은 펀치나 킥 공격을 성공할 수 있었다. 확실히 스파링에 대한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코치들도 은근히 다들 계획이 있던 것인가. 


완벽하지 않으니 시도조차 안 하는 것이 얼마나 나의 삶을 좀먹었는지 생각해 보니 조금은 서글퍼졌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하고 내일도 열심히 무에타이 수업이나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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