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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l 01. 2024

스물아홉이면 뭐가 달랐을까?

#치앙마이 일년살기

내가 다니는 무에타이 체육관에는 나랑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몇몇 있다. 


나와 A, B 이렇게 세 명이다. A는 나보다 한 살이 많고 B의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많다. 나는 한국인 여성, A와 B는 모두 태국인 남성이다. 


이렇게 세 명은 체력이 아주 팔팔한 것은 아니지만 끈기와 집중력을 갖고 꽤나 진지하게 수업에 임한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을 20대 시기는 이미 진즉에 지났고 순수하게 운동이 재미있어서 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뺑끼를 치지도 않고 고분고분 코치들의 말을 잘 따른다. 물론 수업 중간중간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와 힘들어 죽겠다'라는 엄살을 피우기는 한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고 코치가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면서 수업을 마무리했다. 자기소개를 대신해 준 격이랄까. 그런데 들어보니 코치가 A와 B에게는 이름 앞에 'พี피-'라는 단어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는 태국어에서 손윗사람에게 붙이는 단어로 언니/오빠/형/누나의 경우 모두 다 사용 가능하다. 한국어처럼 남녀 구분이 없다. 


코치는 스물아홉 살이니 A와 B보다 훨씬 나이가 어려서 '피'라는 말을 붙일만하다. 이 단어를 들은 순간 나이에 대한 체감이 확 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스물아홉 살이라니. 내가 스물아홉 살이었으면 세상을 정복했을 거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재빠르게 그 생각에 스스로 반대 의견을 냈다.


일단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두 번째로는 스물아홉 살에서 지금 서른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고 잘 살았다. 스물아홉 살을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보낸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체 '잘 살았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대학시절 선배 한 명은 나름 대형 유튜버가 되어서 '자기 계발'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미라클 모닝도 하고 자기 계발 관련 서적 리뷰도 한다. 선배의 콘텐츠를 보면 나도 모르게 흠칫,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 자꾸 어떻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탱자 탱자 유튜브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 사는 게 아닌 건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스스로 돈 벌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하고 살건 남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삶이 아니라면 그 어떤 삶도 모두 나의 삶이고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인데 나는 왜 자꾸 나의 삶을 검열하고 또는 검열당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러서 나는 스물아홉 살인 것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서른일곱이라는 것은 서른일곱까지 잘 살아남았다는 것이니 오히려 긴 생존을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코치가 태국인 형들에게는 'พี피-'라고 하고 나한테는 그냥 이름을 부르네...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슬퍼해야 하는 건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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