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일까 고민해 봤는데 행여(?) 다음 달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무에타이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더 열심히 치앙마이를 즐겼어야 하나라는 후회를 잠깐 하려고 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기에 그런 마음은 접어두려고 한다.
오늘따라 체육관은 일본에서 온 관광객을 포함하여 수강생들이 꽤 많았고 체육관 소속 초보 선수들까지 합세하여 수업을 도와주었다. 초보 선수들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주거나 혹은 '바디 웨이트'라고 하는 맨몸 운동을 지도해 준다. 무에타이를 배우는 중간중간 끊임없이 맨몸 운동을 시키기에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수업시간에 은근히 쉬는 시간이 없다.
오늘의 맨몸 운동을 도와준 친구는 원래는 수강생 신분이었는데 요즘은 시합 준비를 위해 체육관에 나와서 운동도 하고 잔업무도 돕는 친구다. 며칠 전에 헤비급의 코치와 스파링을 하다가 코피가 터진 친구이기도 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건 아마 거의 세 달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인사 정도만 나누었는데 오늘은 그 친구가 나에게 와서 이름을 묻고 서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말을 거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서로 대화를 트고 나니 나를 꽤나 가깝게 생각했는지 운동하다가 등에 뭍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태국인이 이런 부탁을 한다? 이건 나를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빼박 증거다.
모든 치앙마이 사람들이 다 이런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난 치앙마이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다. 고양이 같다! 바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시간을 갖고 관찰한 후에 다가온다. 듣기로는 치앙마이 사람들이 태국인들 중에서도 특히 부끄러움이 많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말이 정말 맞다. 물론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접근에 신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한 번 친해졌다고 인식을 하면 세상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혹은 입이 터져서 끊임없이 자신의 신변에 관한 일종의 스몰토크 small talk를 해댄다. 요즘 주위에 부쩍 이런 치앙마이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보면 내가 이 체육관에 오래 다니긴 했나 싶다. 작년 11월 즈음부터 다녔으니 벌써 9개월이 다 되어간다.
나에게는 치앙마이 사람들의 이런 분위기가 꽤나 잘 맞는다. 한국에서는 너무 내 영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매순간 내 삶 전체를 가져가기를 원했고 회사에서는 상사들이 내 개인 시간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려고 시도했다.
직장 동료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기억에 남는 분 중에 한 분은 입사 첫날부터 불도저처럼 나에게 딱 붙어서 '친한 언니' 인양 나를 대했다. 나는 그러라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만난지 하루만에 나의 개인 영역을 깨부수고 들어왔다.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추후에 알고보니 이것은 나를 당신의 감정 쓰레기 통으로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기초작업이었다. 회사나 동료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나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듣다가 지쳐서 그러한 말과 행동을 거절하려고 하니 나에게 매우 크게 화를 내고는 결국 자신이 제 풀에 못 이겨서 퇴사를 해버렸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아주 안 좋은 의미로.
이런 상황에 있다가 치앙마이에서 생활하니 어찌나 마음이 편하든지.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는 채식 전문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 일이 있다. 왜인지 모르게 그날따라 식당은 손님이 넘쳐나서 자리가 부족했다. 60대 즈음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성 한 분이 들어오셨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젊은 외국인 여성 앞에 가서 앉는 게 아니겠는가. 테이블은 가로로 긴 형태여서 여성분과 남성분은 매우 가깝게 마주 본 상태가 되었다. 자리가 없는 것을 아니 여성도 남성분을 거절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매우 경악스럽게도 남성분은 식사를 하는 30분 남짓한 시간 내내 여성분에게 말을 걸어댔다. 경악스럽다고 표현한 이유는 듣기에 시끄럽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건너편에서 바라본 여성분의 얼굴에 당혹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내가 밥을 먹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계속 말을 걸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낯선 사람에게 허용 가능한 거리를 이미 침범해 들어온 한국인 남성분은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여성분은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인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밥을 먹으면서도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남성분이 하는 말에 꼬박꼬박 다 대답을 해주었다. 다만 식사는 최대한 빠르게 마치고 남성분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는 여성분의 표정은 못 볼 것을 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건너편 여성분은 그 시간을 매우 방해받은 모양이라 내 마음이 다 아팠다
이 광경을 목격하며 다시금 고양이 같은 매력의 치앙마이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참으로 이 도시는 나에게 잘 맞는 도시였다.
이 경험을 발판삼아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 영역을 침범하려는 사람들을 잘 방어해 볼 요량이다.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 없다. 나의 감정과 기분이 가장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