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못 입던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색이 예뻐서 사 둔 반바지였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스트레스+음주+식욕폭발의 삼단콤보로 인해 전혀 입을 수 없던 바지다. 치앙마이 생활 거의 일 년 만에 드디어 이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물론이요 허리 쪽이 커서 허리를 한 번 접어서 입게 되었다.
나름 감개무량하여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았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치앙마이 생활 초반까지. 나는 정말 아주 치열하게 '무언가에 쫓겼다'. 성과에 대한 압박 같은 것이었다.
한국생활의 압박은 설명하기 쉽다. 회사에서 성과평가라는 것을 받았다. 그렇다고 회사가 성과평가를 잘한 것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평가의 기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준을 만들고 평가를 했다. 나에게는 일은 잘 하지만 회사의 조직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렸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지만 성과평가에 따른 연봉인상률 숫자를 보고 나는 내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개인적인 삶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나를 갈아 넣은 결과가 고작 이런 무례함인가.
부모님과의 관계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부모님 역시 나에게 성과를 요구했다. 그들의 말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성과였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치앙마이에 오기로 결정하고 도착한 초반, 나는 여전히 성과에 쫓겼다. 이를테면 한 달에 4kg씩을 빼고 태국어를 완벽히 공부하고 책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라인으로 코딩수업을 듣자, 이런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스트레스가 응축되어 공황발작과 심한 우울증이 와서 2주 정도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성과'에 관련된 계획은 모두 폐기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와서 컨디션이 좋을 때는 운동, 글쓰기, 식단관리 등을 열심히 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살도 빠져서 이렇게 못 입던 바지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만약 회사생활을 다시 하게 된다면 다시금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깨달았다.
한국에 있을 때 재무전문가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숫자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숫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실무경험이 없기에 이상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과장을 좀 보태서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며' 손댄 것들은 죄다 하나도 맞지 않았다.
숫자가 아니라 가치가 먼저인 것이다. 가치를 따르다 보면 숫자도 따라온다.
치앙마이에서의 나는 성과를 내려놓고 나 자신을 돌보는 가치를 따랐고 그러자 성과가 따라왔다. 물론 더 힘들게 성과관리를 했다면 지금 즈음 더 많은 것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 장담하건대 그랬다가는 오랜 기간 지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디프로필을 찍고 한 달 만에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현상을 겪었을 것이다.
나 자신을 해쳐가면서까지 성과를 추구하고 싶지 않다. 치앙마이에서 나는 이 방향성에 대해 깊이 깨달았고 다음번에 또 다른 시련이 닥치게 되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