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를 떠나는 과정에 대해서 이것저것 글을 준비하다가 우선 다 때려치우고 이 글을 쓴다.
기안 84님 버금가는 파워 P인 나는 치앙마이를 떠나는 짐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새벽이 되어서야 다 정리했다. 심지어 그다음 행선지인 방콕에서 머물 숙소는 치앙마이를 떠나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바로 전에 예약을 끝내고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콕 여행은 지금까지는 내 인생 최악으로 기억될 만큼 별로다.
우선 숙소. '대-충' 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라길래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20분이 내가 생각하는 20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비좁은 도로에 끝없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복잡한 길을 20분을 걸어야 역이 나오는 곳이었다. 주택가여서 조용할 줄 알았는데 그 주택가가 우리나라로 치면 청담동 같은 고급 주택가인데 근처가 죄다 다 값비싼 음식점, 카페, 클럽 같은 곳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조용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비슷한 금액이었다면 훨씬 더 좋은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틀 정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그 어떤 감흥도 없었다.
어딜가건 대형 쇼핑몰 뿐이었다. 그러니까, '쇼핑을 안 하면 너는 그냥 나가 죽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일종의 쇼핑의 가스라이팅을 해대는 분위기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약간 공황발작이 왔을 때의 전조증상 같은 것을 느꼈는데 그나마 너무 많이 걸어 다녀서 그 증상이 튀어나오지 못한 것 같다.
음식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고 맛집을 찾아갈 기력도 없고 그래, 커피값은 왜 이리도 비싼지. 커피가 기본 100바트부터 시작하는데 치앙마이 보다 40~50% 정도 비싼 수준이다.
방콕을 뒤로하고 하루 정도는 근교를 나가보자 싶어서 지금은 기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아유타야'에 와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 포지션인 곳으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연상케 하는 유적지가 몰려있는 곳이다.
이곳이라면 그래도 여행을 할 만하겠지?
오토바이를 빌려 탔는데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에 300바트를 받는다. 20만 킬로를 넘게 탄 오토바이다. 치앙이라면 300바트면 거의 새 오토바이를 24시간 빌릴 수 있다.
그래도 씩씩하게 빌려 타고 첫 유적지에 도착했는데 첫 유적지부터 별 감흥이 없다. 내 눈에는 그저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만 보였다. 이곳이 과거에 얼마나 찬란한 의미를 갖고 있던 장소건 지금은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사진용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유타야
여기까지 끝내고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오토바이를 몰고 아유타야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카페로 피신한 참이다.
방콕도, 아유타야도 기대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방콕은 처음 오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두 어 번은 여행했었는데 과거에는 그래도 나름 재미있게 지냈었다.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방콕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지금 너무 쫓기고 있다는 현실 파악에까지 이르렀다.
그래, 지금 나는 쫓기고 있고 그것이 너무 싫다.
평생을 부모님/학교/회사 등등에 쫓기고 살았다. 다들 죽어라 나를 쫓아왔고 나에게 성과를 강요했다.
아, 나는 그게 너무도 싫었다.
치앙마이에서의 나는 어학원과 무에타이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맘대로 살았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목적지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를 누볐다. 그동안 당했던 것에 복수라도 하듯이 푹 늘어져서 지냈다.
그러다가 방콕으로 오고 난 이후부터 다시 쫓기는 모드가 된 것이다. 1분 1초가 아까워서 쉬지 못했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찾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도착을 해도 그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는 다음 행선지를 생각했다. 혹은 내가 지금 들인 비용을 따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지금 이러한 상황인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불만족하는 상황을 인지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있다. 어제저녁에는 몸이 너무 힘든데도 또 어딘 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멈추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서 푹 쉬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하는 중이다.
무가치한 경험은 없는 거야. 지금 이 상황 덕분에 나는 내가 어떤 여행 유형을 좋아하는지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어. 다음에는 이곳에 오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지금 이렇게 쫓기는 경험을 하는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완충작용 같은 것을 해줄 거야. 치앙마이에서 편하게 있다가 바로 한국으로 갔다면 준비도 없이 스트레스 상황과 마주했어야 해. 그나마 방콕에서 스트레스 상황을 미리 경험하고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 한국에 가서 조금은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혹은, 시간을 잘 보냈다 아니다의 기준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내가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어도 그 시간은 어차피 빠르게 과거가 되어버린다. 봐라, 치앙마이 생활도 벌써 끝났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반대로 별로인 시간도 어차피 빠르게 과거가 되어버리니 별로인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아쉬워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혹시나 지나친 허무주의와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약간 우려를 표하며. 그래도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을 잘 즐겨보도록 해보자가 지금의 결론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