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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Sep 21. 2023

사바이 사바이

#치앙마이 일년살기

그 악명 높다는 치앙마이 이민국에 방문했다. 


악명이 높은 이유는 태국의 행정처리 자체가 느린데 치앙마이 이민국은 항상 비자 때문에 방문하는 외국인이 너무 많아서 처리가 늦어도 너무 늦기 때문이다. 이민국이 문을 여는 8시 반 이전인 8시 15분쯤 도착했는데 내 앞에 벌써 79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이민국을 방문한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는 분들이 있었다. 홀로 찾아온 백인 남성 노인들이다. 족히 80세는 넘어 보이는 이들은 눈빛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힘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분명 치앙마이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은퇴 이민자일 것이다. 반면 태국인 여성으로 보이는 부인과 함께 온 백인 남성들은 부인의 돌봄을 받아서 그런지 조금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두 부류의 노인들 모두 이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이민국에서 1차로 서류를 점검받는 장소


치앙마이는 저렴한 물가와 더불어 의료시설 등 각종 인프라가 잘 갖춰진 덕에 전 세계인들의 은퇴지로 각광을 받는 도시다. 외국인 노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너무도 처량한 모습으로 이민국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노인들을 보며 무례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정신을 놓고 산다면(?) 저 모습이 나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를 것 같아서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이라도 제발 좀 내려놓자고 생각한 '열심히 살자'라는 마음이 불현듯 마음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행히 줄이 빠르게 줄어들었고 예상보다는 빠른 2시간 만에 내 순서가 되었다. 치앙마이 이민국은 번호표를 받은 뒤 순서가 되면 1차로 서류를 확인하고 다시 번호표를 받아 건물 안의 사무실로 들어가 실제 서류를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1차에서 확인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직원이 종이서류를 막 뒤지더니 서류가 하나 빠졌다고 어학원에서 다시 받아 오라고 나를 돌려보냈다. 태국어로 된 서류이고 어떤 서류인지 설명도 없이 샘플을 보여주며 사진을 찍어가라는 말만 했다. 그 길로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타고 어학원 사무실로 달려가니 MZ세대로 보이는 직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정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인데, 이민국은 매번 요청하는 서류가 달라져요...'라는 식으로 나름의 변명을 했다.  


정부사업을 많이 해본 나로서는 서류 미비로 행정처리를 거절당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어학원에서 비자 서류를 준비해 주는 비용이 상당한데 서류를 빠뜨려서 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어학원 직원에게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한국이라면 내가 진상 민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화를 내야 소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학원 직원에게도 웃어넘겼다.


환경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 한국은 속도가 느리면 모두들 화를 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 제품의 품질이 나빠도 모두들 화를 내기 때문에 각종 제품의 품질도 좋은 편이다. 사회 전체가 '더 나음'을 향해 무한히 화내고 경쟁한다. 결과물을 손에 받아보아도 만족은커녕 그다음 단계를 원한다. 그래서 한국이 살기 좋은데 그래서 한국에서의 나의 정신 건강은 썩어 문들어졌다.


반면 이곳 태국은 그 정도의 경쟁까지는 없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다. 여기 있으면 '사바이 사바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좋은, 편한'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누가 '사바이디?'라고 물으면 'How are you?'라는 뜻이고 여기에 '사바이 사바이'라고 답하면 대부분의 태국인들이 환하게 웃는다. 정확한 뜻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여기서 느끼는 '사바이 사바이'는 '좋게 좋게'의 의미다. 오늘 같은 일에도 웃으며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화내지 않는 상태랄까.


이런 특유의 사바이 사바이 한 분위기가 은퇴 이민자들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굳이 인생에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남은 여생을 웃으며 편하게 보내기에 이 보다 더 어울리는 마음 상태가 어디 있을까?


사바이 사바이 하다가 오늘 본 서양인 노인들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불안을 느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게 내가 한국 사회에서 오랜 시간 당한 가스라이팅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상태인 건가? 혼자 검소한 생활을 하며 치앙마이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나는 은퇴 생활을 해도 풍족하고 화려하게 사는 것을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 빠르고 더 좋은 것이 항상 절대적 선인 것일까. 조금은 느리고 품질이 떨어지는 세상에 살아도 내 마음만 행복하면 그것으로도 괜찮은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종종 유튜브로 치앙마이의 숙소를 비교한 영상을 보고 '나도 저렇게 시설이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다. 숙소를 비교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공황발작 이후 잦아들었던 심장 두근거림 증상이 조금씩 다시 느껴지고 있다.


사바이 사바이한 상태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은데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데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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