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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Oct 11. 2023

쿨거래

#치앙마이 일년살기

오늘은 시운전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태국에서 중고 스쿠터를 구매했다. 아, 이 말을 써놓고 보니 나도 웃기다. 중고인데 시운전을 안 해보다니... 그냥 시동 잘 걸리고 이상한 소리 안 나고 외관 멀쩡하고 바퀴도 거의 새것인 것만 확인했다. 


치앙마이의 대중교통은 없다고 봐야 하고 장기거주 시 매번 택시를 타는 것은 부담스럽다. 한 달이면 렌트를 하겠지만 1년이면 구매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한국에서 아무리 스쿠터를 능숙하게 탔다고 해도 치앙마이에서의 운전은 권하지 않는다. 한국과 차선도 반대에 일방통행인 도로가 많아 헷갈리고 차와 스쿠터가 뒤엉켜 다닌다. 나는 태국에서만 스쿠터를 운전하며, 매우 쫄보라 시속 40km를 넘지 않는 선에서 극도의 방어운전만 하기에 큰 탈 없이 다니고 있다. 


원래는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스쿠터 구매를 완료하려 했건만,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5일 차에 경험한 공황발작 때문에 모든 계획은 보류했다. 그때는 다음날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정도였기에 스쿠터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몸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며 계속 걸어 다녔는데,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걸으며 천천히 둘러보는 치앙마이도 꽤 좋았다. 


겁이 나기도 했다. 스쿠터를 타고 가다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작년에 치앙마이에 왔을 때 스쿠터를 렌트했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거여서 4차선 도로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린 공포스러운 경험도 떠올랐다. 


스쿠터를 신차로 구매할지, 중고로 구매할지도 고민이었다. 중고매물은 사고이력을 속이거나 하는 식으로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너무 많은 생각을 스쿠터에 쏟았고 그러다 날씨가 좋은 데 나가보지 않은 날도 있었다.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나왔는데 누군가에게 소개받은 중고 샵에서 본 매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버린 것이다. 10여 년 즈음에 태국 푸껫에서 한 달을 타고 다녔던 혼다의 Zoomer X라는 모델이다. 110cc의 아담한 크기라 나처럼 동네나 다니는 정도에는 아주 제격이고 스쿠터가 쓰러지거나 해도 이 정도는 내 힘으로 컨트롤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예쁘다. 그래서 비슷한 성능의 다른 제품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인데 예뻐서 용서가 된다.

 

Zoomer X에 꽂힌 후 다방면으로 가격대에 대해 찾아봤고 해당 샵의 제품이 적정가인 것을 확인하자 오늘 오전에 현금 다발을 뽑아 들고는 샵에 가서 대충 시동만 켜보고 구매를 마쳤다. 직원도 약간은 놀란 눈치였다. 태국인들도 중고 거래할 때 이렇게까지 쿨거래를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왠 까올리(한국인을 뜻하는 태국어)가 와서 물건을 5분 보고 구매를 확정하다니. 그래도 디스카운트를 물어는 봤는데 3만 6천 원 정도 할인을 제안받았고 거기서 더 깎지도 않았다. 그 이전에 고민한 시간이 너무 많으니 구매는 빠르게 끝냈다.


하얀색 녀석이 1년간 나와 함께할 Zoomer X 2020년 모델이다
중고 스쿠터샵에 놓인 복을 기원하는... 그 어떠한 것.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는데 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쿨거래인 듯 쿨거래가 아닌 거래를 끝내고 나는 지난 1주일 간 나를 괴롭히던 고민 지옥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현명한 거래, 그거 좋다. 같은 물건도 다 다른 가격에 파는 세상이다. 태국은 그게 특히 심해서 완전히 같은 물건인데 어떤 장소에서 파느냐에 따라 물건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우리는 거의 최저가에 근접한 구매를 해야 현명한 소비자이기 때문에 최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발품을 판다. 다 좋다. 다 좋은데 진이 빠진다. 내가 절약한 물건의 가격이 내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한 시간의 값어치보다 과연 높을까? 


나는 돈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밑에서 자랐고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한 푼을 아끼려는 방법을 찾아냈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아쉬워서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렇게 아마도 인생의 많은 시간을 돈만 생각하다가 흘려보냈을 것이고 이번에도 1주일 정도는 그랬다. 그래, 아빠가 주식을 시작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주식 차트를 보다가 나에게 폭언을 퍼붓던 때도 떠오른다. 딸과의 소중한 시간보다 돈이 더 중요했고 그것도 모자라 딸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주었으나 그는 아마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조금씩 그때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는 중이다. 그래서 종종 이런 결과가 나온다. 고민은 하되 거래는 쿨거래. 그리고 그 이후에는 고민을 언제 했냐는 듯 더 이상의 생각은 이어나가지 않는다. 잘 샀으니까 이제는 이걸 갖고 치앙마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지. 


그래, 이번에는 1주일을 고민했는데 다음에는 그 고민을 5일 정도로 줄여보자. 갑부가 되지 않는 이상은 돈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는데 그렇다면 이 고민을 덜하게 최대한 쇼핑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겠다. 


돈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도 않겠지만 돈에 종속되는 삶을 살지도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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