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를 샀다고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을 싸돌아 다니느라 꼭 여행하는 기분이다. 물론 지금의 내 상황은 거주와 여행의 경계선에 걸쳐 있어서 여행 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긴 하다. 태국어 공부도, 독서도, 운동도 슬그머니 옆으로 치워두고 신나게 치앙마이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
오늘은 치앙마이 시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도이수텝으로 향했다. 태국어로 도이 Doi가 산이라는 뜻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수텝 산' 정도 되는 이름이다. 치앙마이에 올 때마다 스쿠터로 도이수텝의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은 두어 번씩은 꼭 오른다. 스쿠터로 산을 오르다니, 한국인 입장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태국이 이렇다. 유명 산에는 도로가 닦여있어 스쿠터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도이수텝은 해발 1,676m나 되는 산으로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뿐만 아니라 야영장, 푸핑 궁전(왕궁이라고 한다), 소수민족 마을, 심지어는 커피 농장까지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내가 머무는 치앙마이 시내에서부터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까지 스쿠터를 타고 올라가면 족히 한 시간은 되는 거리다. 속도를 내면 더 빠르게 올라갈 수 있겠지만 최고 속도 30km까지밖에 못 내는 나는 굳이 서둘러 오르지 않는다. 길은 생각보다 잘 닦여있어서 오르기 어렵지는 않은데 3차선 정도 되는 도로에서 스쿠터, 자전거, 차가 뒤엉켜 오르내리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서 운전을 해야 한다. 그렇다, 방금 자전거라고 적었다. 천 미터 급의 산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동호인들도 많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보았는데 도이수텝의 도로를 '업힐'이라고 하여 오르고 싶어 하는 동호인들이 많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갈 때 스쿠터를 타는 나보다 더 빠르게 내려가는 분들을 보았고 저래도 과연 안전한 것인가?!라는 의문부호가 머릿속에서 깜빡거렸다. 물론 무사히 내려가셨겠지만 저분들보다 내 수명이 더 길 것만 같은 것은 그냥 느낌적일 느낌일 뿐일까.
오늘의 목적지는 비단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뿐만은 아니었다. 구글맵을 살펴보다가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을 오르는 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왓 파랏 사원이란 곳이 있어서 클릭을 해보았는데 너무도 아름답다는 평이 지배적이라 이곳을 먼저 들렀다. 지금까지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을 거의 열 번은 넘게 올랐을 동안 왓파랏 사원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도이수텝=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이라는 공식이 너무 머릿속에 선명해서 중간에 멈춰 서서 다른 곳을 가볼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나의 110cc짜리 스쿠터는 도이수텝을 오르는 길을 살짝 버거워했지만 무사히 왓 파랏 사원 입구에 도착해 사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치앙마이 최고의 사원은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아니, 치앙마이를 떠나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은 본 적이 없었다.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은 태국 북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인 란나 왕국의 건축양식을 매우 잘 보여주는 사원으로 규모는 작지만 매우 화려하다.
이에 반해 왓 파랏 사원은 타임 슬립을 하여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려한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에 비해 소박하지만 주변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사원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푸른색 이끼가 소박하게 내려앉은 모습은 태국 보다는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사원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했다.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며 어딘가를 둘러보는 것은 인도 타지마할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요즘 치앙마이는 계속 비가 내리고 오늘도 약간 비가 올락 말락 한 날씨였다. 살짝 뿌연 날씨는 오히려 특수효과처럼 숲으로 둘러싸인 왓파랏 사원의 모습을 더욱더 신비롭게 해주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도 수분을 잔뜩 머금은 숲 속 맑은 공기가 폐 안으로 충분히 들어와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스스로가 치앙마이를 꽤나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왓파랏 사원을 이제야 와보다니.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놓치지 않고 이곳에 올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 스쿠터를 구매한 비용 160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왓 파랏 사원을 다 돌아본 시점에 비가 올 것만 같아서 바로 내려갈까도 생각했지만 왜인지 오기가 생겨서 왓 프라텟 도이수텝 사원까지 그대로 내달렸다. 왓 파랏 사원을 보고 나니 왓 프라텟 도이수텝 사원은 너무 번쩍이고 세속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은 태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전 국왕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서거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는 공휴일이었고 치앙마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사원인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에서 라마 9세를 기리는 법회가 진행 중이었다.
너무도 경건한 마음으로 법회를 진행하고, 그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전 국왕의 명복을 비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태국 불교 신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자신들의 소원을 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꼭 태국 국왕의 사진이 놓여있다. 태국 국왕은 부처와동일한 급으로 추앙받는다.
태국 국민 최저 시급이 350바트, 우리나라 돈으로 1만 4천 원 정도인데 어느 사원을 가도 건물은 번쩍번쩍 빛나고 그것도 모자라서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은 불탑에 금박도 붙여 놓았다.
부처를 모시는 사원도,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태국 국왕도 국민들 보다는 수천 배 부유하다.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을 상징하는 불탑인데, 명당 자리에서는 장당 100바트를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서비스도 있다
블링블링한 사원에 뭔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모습
독특한 표정의 불상, 중생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내리고 싶은 걸까
나는 태국에서는 처음 본 나무로 만든 불상
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는데 태국에 오면 생각은 깊어져 확신으로 변한다. 태국 왕실도 이걸 알았는지 자신들도 비즈니스에 성공적으로 합류하여 막대한 부를 누린다.
비단 태국에서 만의 일이겠는가.
그래도 덕분에 아름다운 사원을 구경할 수 있으니 관광객 입장에서는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