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당 Nov 16. 2023

나는 맨 정신으로 너를 기억하고 싶어

#치앙마이 일년살기

치앙마이에 놀러 온 전 직장 동료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그녀와 나, 모두 술을 꽤나 즐기는 모습으로 서로를 기억했다.


업무적으로 너무도 얽혀있다가 친한 동료들끼리 가진 술자리를 기점으로 친해졌다. 우리의 첫 술자리는 그녀와 나를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고 알고 있다. 나도 참석한 자리였지만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술자리를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마시고 울었다고 했고 그녀도 무사히 귀가는 하였으나 가다가 아이팟 한쪽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 우리가 치앙마이에서 재회하였으니 거나한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 당연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현재 금주 중이다. 둘 모두 술을 즐겼던 만큼 술로 인한 폐해도 그만큼 더 크게 와닿았나 보다.


술은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마셨다. 인생 첫 술자리에서 정확히 소주 한 병을 마셨고 알딸딸하게 취해 버스 제일 뒷자리에 올라타 집으로 가던 날은 아직도 흐릿하게나마 기억한다.


대학생 시절은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이 공부를 하라고 보내놓은 대학교일 텐데, 다들 모였다 하면 술만 마셨다. 덕분에 많은 이들과 친해졌으나 지금 연락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내 동생도 그렇다. 폭음은 대를 이었고 내가 술로 인해 힘들어했던 것만큼이나 동생도 그럴 것이다.


수많은 순간을 술로 인해 맞이하였으나 술로 인해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맨 정신으로는 타인과 대화하기 어려운지. 술의 힘을 빌어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혔지만 기억은 남지 않았다.


술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았는데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한 1회의 공황발작 덕분에 적어도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83일간은 술의 속박에서 벗어난 삶을 즐기는 중이다.


술의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술을 찾는 처참한 날이 반복되던 날, 나는 간절히 속으로 되뇐 적이 있다. '나는 맨 정신으로 당신을 기억하고 싶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술의 힘을 빌어서 힘들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관계는 나에게 소중한 관계가 아니다. 그런 관계에 내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나에게 소중한 관계라면, 술이 없어도 함께 서로를 존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맨 정신으로도 불편함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타인에게만 나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왜인지 모르게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가졌던 나와 그녀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대체 이게 뭐라고 오버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간, 적어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뇌가 술에 절여져 살아왔던 사람에게는 오늘과 같은 날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날이다. 감옥에 가본 적은 없지만 감옥에서 출소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술이 나에게 감옥이었으니 술에서 벗어난 삶을 출소에 비유하는 것도 꽤 잘 어울린다.


나는 오늘 맨 정신으로 당신과 함께했고, 우리가 나눈 대화나 함께 걸은 길의 풍경과 분위기를 기억의 한편에서 꺼내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은 존재에 대한 나의 불안을 크게 줄여주었다. 술이 없이도 나는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밤의 치앙마이. 위험하지 않으니 밤 산책을 해볼 것도 추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분명히 감정을 억누르라고 배웠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