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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Nov 09. 2023

의지의 한국인

#치앙마이 일년살기

오늘은 두 시간 남짓 선잠을 잤다. 


별일 아니라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마음이 쉽게 편안해지지는 않았고 결국 잠을 거의 못 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치앙마이에서 중고로 오토바이를 구매한 것에서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Zoomer X라는 모델을 흠모해 오던 나는 결국 중고로 하얀색 모델을 구입했다. 한 달 전의 일이다. 


살짝 시중가보다 비싼 것 같았지만 동네의 중고 오토바이 가게에서 산 것이고 그들은 거기서 수년간 장사를 하고 있기에 뭐랄까, 그냥 믿어버렸다. 몇 만 원 즈음은 텀탱이를 써도 괜찮았다. 


최근에 구동계 쪽에서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났고, 별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토바이의 혼다 워런티 기간이 남아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업으로 행정 업무를 오래 담당했고 성격적으로도 한 번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태국어 번역기까지 쓰며 검색해서 태국 혼다의 오토바이 관리 어플을 찾아냈고 회원가입을 해서 차대번호를 검색해 봤다. 등록이 불가능하다고 떴다. 처음에는 이미 기존 구매자가 해당 차대번호를 등록해 두었기에 내가 이 번호를 승계받아야 워런티도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 우연히 차대번호를 구글에 검색해 보았는데, 차라리 그러지 말 것을 그랬나, 정말 딱 하나의 게시물이 검색되었고 그 이후 약 하루간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없다. 


딱 하나 뜬 게시물은 태국에서 서비스되는 AUCT라는 일종의 '경매' 서비스의 웹사이트였다. 이 업체의 웹사이트 항목 중 '기업 소유 오토바이 경매'라는 항목이 었었고 내가 검색한 차대번호가 경매 매물 중 하나로 검색되었다. 차대번호, 엔진번호, 차량등록증까지 내가 구매한 오토바이와 일치했다. 경매는 내가 오토바이를 구매하기 약 한 달 전에 진행되었는데,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주행거리와 내가 오토바이를 구매했을 때의 주행거리가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이걸 본 순간 어찌나 머리가 띵 하던지.


내가 샀을 때의 주행거리는 8200km였던 반면, 경매 사이트에 기록된 주행거리는 2.5만km였다. km 옆에 '경매 최초 시작가'도 적혀있었는데 시작가는 2만 바트. 내가 구매한 가격은 4.1만 바트. 중간에 누군가 큰 이익을 본 것이 확실해보였다.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나의 오토바이. 25000km가 넘은 녀석이었다니...


이걸 알게 된 이후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한 오늘 오후까지 나는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선은 태국 혼다 홈페이지에 문의해서 키로수가 조작된 것 같다, 서비스 센터에서 확인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답변받아서 근처 서비스 센터를 찾았지만 정비공은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 중간에 경찰서에 가서 이 문제를 논의해 볼까 했지만 일단은 상황에 대해 묻고 싶었기에 오토바이를 구매한 중고 매장에 메신저로 상황을 설명했다. 


태국인들에게는 정면으로 비난하는 것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미건조하게 상황만 나열하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 수 있니?'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들었던 것 같은 직원은 이내 '우리도 이걸 제 삼자에게 구매한 것이다. 네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우리도 이 사실을 몰랐다. 원한다면 10%를 공제하고 다시 우리가 매입을 하겠다.'라고 답변을 주었다. 생각보다는 시시한 결과.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예상했던 바인데 이렇게 빠르게 해결책을 제시할 줄은 몰랐다. 증거가 너무 명백했나 보다. 이 미친 한국인이 이런 걸 찾아낼 줄은 몰랐겠지. 아마 그들은 경매 결과가 회사의 웹사이트에 게시되는지도 몰랐을 것 같다. 


그 사이에 머물고 있는 콘도 직원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무려 세 명의 직원들이 내 오토바이를 둘러싸고 같이 고민을 해주었다. 오토바이를 잘 아는 남직원은 그래도 오토바이의 엔진상태는 꽤 좋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미 계기판이 조작된 것을 안 이상 정확한 주행거리도 모르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국을 떠나기 전에 오토바이를 되팔아야 하는데, 계기판이 조작된 오토바이를 다른 선량한 개인에게 팔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자 중고 오토바이 가게의 직원이 'ต้องขอโทษคุณจริง 정말 너에게 사과한다'라고 말했고 비로소 나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도 한 달 동안 오토바이를 탔으니 10%의 공제비용은 렌트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대는 태국어로, 나는 영어로. 둘 다 번역기 써가며 대화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게 해결될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는 것. 이것이 정확히 내가 회사생활을 하던 때의 모습이다. 정부사업을 담당하다 보니 이번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될 규모의 다양한 사건이 터졌는데 매번 이렇게 마음을 졸였다. 한국이었다면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맥주부터 찾았겠지만 지금 내 옆에 놓여있는 것은 탄산수다. 


정신을 차리고 오늘을 돌아보니 내가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낀다. 술도 찾지 않았고 신경 쓰여서 잠을 못 자는 와중에도 속으로 '괜찮아, 이건 쉽게 해결 가능한 문제야'라고 의도적으로 생각하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결정적으로는 태국 생활을 하면서 태국인의 문화에 대해 배웠기 때문에 중고 오토바이 가게에 맹비난을 쏟으며 정면승부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다. '나는 당신의 전문성을 신뢰하기에 당신에게 오토바이를 구매했고 지금도 그렇다. 나만큼 당신도 피해자고 놀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상대를 자극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다시 배운 기분이랄까. 


한국에서는 일로 부딪친 사람들에게 전혀 말을 돌려가며 하고 싶지 않았고 정면 승부하면서 처절하게 피 흘리며 싸웠다. 너무 싫어하는 사람들이어서 그것에 큰 후회는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야 오늘처럼 정치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걸 배웠다. 


내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은 삶에서 조금씩 통제권을 되찾는 방법을 배워 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어메이징 타일랜드. 심심할 틈이 없다.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문제를 해결한 나에게는 김치찌개 1회 흡입 및 도넛+밀크티로 보상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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