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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Aug 13. 2020

90년대 중반 일요일 오후 냄새   

푹  익힌 삼양라면


얼마 전 마트에서 삼양라면을 보았다. 어릴 때 삼양라면을 자주 끓여주셨던 아빠 생각이 났다. 그 옛맛이 그리워서 오랜만에 삼양라면을 샀다.

삼양라면을 끓이는데 삼양라면 특유의 햄 향이 집안에 두루 퍼진다.

하... 내게 이 향은 아빠가 라면을 끓여주시던 90년대 중반 어느 일요일 오후의 냄새다. 아빠가 라면 봉지를 뜯고 계실 때 거실에서는 주로 KBS 주말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구슬픈 젊은이의 양지 오프닝 곡을 들으면서 접시를 세팅했다.

삼양라면의 트레이드 마크는 어딘가 건강에 해로 워보이지만 먹고는 싶은 쪼그만 햄 몇 조각이다. 햄을 얼른 건져 올리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이던 내 젓가락질이 생각난다.

라면을 끓일 때마다 아빠가 항상 하시는 이야기 레퍼토리가 있었다. 한 900번은 들었을 그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삼양라면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이데이. 못 먹고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값싼 라면대중화된 거라. 라면에 파가 얼마나 우리 피를 맑게 하는지 아나. 파랑 양파 많이 먹어라이. 파 게려 (가려) 먹지 말고'

이 외에도 음식과 관련된 아빠의 이야기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생선이 식탁에 나오면 나는 예상한다.
'아, 곧 생선 뼈 이야기 나오겠..'

"생선뼈는! 절대로 한쪽 먹고 뒤집어서 먹는 거 아이라. 꼬리를 잡고 뼈를 통째로 발라서 먹는 라. 옛날에 독일 갔을 때 같이 갔던 동료가 생선을 한쪽 먹고 히딱 뒤집었는데.. 블라블라"

삼겹살을 구울 때도 나는 생각한다.

 '아, 이제 곧 비계 얘기 나오겠구나. 하나, 둘, 셋 큐!'

"돼지고기는! 비계 맛으로 먹는 라. 살코기는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으. 비계 떼고 먹는 사람은 고기 먹을 줄 모르는 라"

암튼 라면의 역사와 파의 효능을 지나 평소 내가 파를 안 먹는다고 혼이 날 즈음 라면이 완성되었다.

아빠는 파를 썰어 넣고 계란은 휘휘 저어서 면과 함께 푸욱 익혀 드시는 걸 좋아하셨다. 반면 나는 계란은 그 모양 그대로 큼직하게, 면은 꼬들하게 먹는 걸 좋아했다. 아빠와 정반대의 입맛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끓이는 사람 이었다.

너무 푹 익혀서 잇몸으로도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식탁 위에 올려진다. 그런데 묘하게 그 라면이 맛있었다.

"후후.....호로로로록, 쩝쩝....서걱서걱, 달그락 허업 후루루루루룩 쩝쩝 서걱서걱서걱"

아빠의 라면과 김치 ASMR 서라운딩 사운드를 들으며 따라먹었던 그 라면이 내 취향은 아니었어도 참 맛있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파를 넣고 계란을 좌라락 풀어 재낀 다음 면을 푹 익혀 먹는다 해도 그때 그 맛이 아니다.


2주 전에 친정에 여름휴가를 가서 아빠한테 삼양라면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그랬었다고.
이제 나이 일흔이 넘으신 아빠는 머쓱해하신다.

"내가 라면 많이 끓여줬지.."


"아빠, 오랜만에 삼양라면 먹을까? 아빠 스타일대로 푹 익혀서"

"조오치~!!"

그리고 다음 날 부엌에서는 신중한 칼질 소리가 났다.  "탁. 탁. 탁. 탁. 탁"

'오 벌써 라면 준비하시나? 파 써는 소리 같은데..'

아빠는 감자, 양파, 당근을 초집중해서 썰고 계셨다. '라면 조오치~!!'라고 대답해놓고 볶음밥을 준비하고 계셨다.

요리 하는 아빠

"너거 어릴 때 아빠가 해준 볶음밥 기억나나?
볶음밥은 식용유 대신 마가린을 넣어야 고소한기라".

마가린을 듬뿍 퍼서 팬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으며 지글지글 거품을 일으킨다. 고소한 냄새가 부엌 전체에 진동한다.

"와 팝콘 냄새다, 팝콘 냄새!"
팝콘인 줄 알고 미니 인간들이 달려왔다가 팬 안에든 볶음밥을 보고 실망하며 돌아간다.


하... 아빠 볶음밥 냄새, 이것도 내가 기억하는 90년대 오후 냄새 중 하나다. 밥을 볶는 아빠의 얼굴이 번들번들 땀과 기름으로 얼룩졌다. 런 아빠의 모습이 좋았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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