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서류의 나라, 필리핀
총 17일의 일정이다. 짐 싸기를 미루고 또 미루다가 떠나는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꾸역꾸역 싸기 시작했다. 비행기와 숙소 구할 때 빼고는 세부에 대한 서치도 별로 안 해봤다.
세부행의 원래 목적은 친정엄마 칠순 여행이었다. 친정식구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설연휴쯤 세부여행을 할 예정이었는데 이왕 비행기 타는 거, 3박 5일은 아쉬울 듯하여 두 아이와 친정언니, 나 이렇게 넷이서 2주 먼저 출발했다.
2년 전, 말레이시아 두 달 살기를 갈 때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리라는 포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없다.
'또 매일 뭐 할지 고민하겠지. 지루함과의 전쟁이겠지. 그렇다고 뭘 체계적으로 계획하는 건 숨이 막히니까 일단 가보고 결정하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엄청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하고, 개고생을 하기도 하고.. 뭐 그런 거겠지'
매너리즘에 빠진 극 P의 사고체계는 대략 저러하다.
저가항공을 선택한 우리에게 허용된 수하물은
인당 기내 수하물 7kg+보조가방
우리는 그것마저 다 채우지 못하고 여유롭게 간다. 어지간한 건 저렴이로 사서 쓰고 버리고 오자는 생각이었는데, 필리핀 물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전혀 몰랐던 오산이었다.
다시 출발 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래의 물품은 미리 준비를 해서 올 것 같다.
물티슈, 빨래집게, 빨랫줄, 가벼운 욕실 슬리퍼, 작은 플라스틱 반찬통, 작은 손세정제, 샤워볼, 동전지갑(동전 많이 씀)
입국하자마자 난관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입국심사대에서 처음으로 퇴짜를 당했다. 이유는 E-트레블 QR을 준비하지 않아서다. 이런 기본적인 준비조차 간과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 현장에서 일행들 QR생성하는데 약 40분이 소요됐다.
가까스로 공항을 빠져나와 그랩을 잡고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다.
공항 -> 막탄 뉴타운 그랩비: 300페소/약 7500원(이용시간, 교통상황에 따라 가격은 유동적)
차에서 짐을 내리는 순간, 공항에서 수하물 하나를 누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트래블 QR 때문에 넋이 반쯤 나가 있었던 여파다. 그때 바로 공항으로 갔어야 했는데 날이 밝으면 가리라던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큰 개고생을 몰고 올지 이때는 알지 못했다. 인생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시작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숙소에서 새벽 5시쯤 자고 일어나, 동네 산책을 했다. 한국어 간판이나 물건이 심심찮게 보이고, 현지인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안전하고 인프라가 좋으며 물가가 비싸고 모험할 일은 크게 없는 다소 보수적인 지역에 들어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막탄에서의 첫 식사는 맥도널드다. 수중에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 카드결제가 확실히 가능할 맥도널드로 왔다. 이런 낯선 땅에 익숙한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안정감을 준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입력하고 결제를 눌렀는데 카드 결제 버튼이 안 뜬다. 계속 헤매고 있으니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현금 결제만 된다고 일러줬다.
What?!!!!!!
세계 최대의 글로벌 체인인 맥도널드에서 현금만 받는다는 것은 지금이 2025년임을 감안했을 때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면 영수증이 발급되고 그 영수증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현금으로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하고 어이없는 시스템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부에서 ATM기를 찾아다니는 고행의 시작이. 맥도널드에 언니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나와서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ATM기 하나를 찾았는데 도통 내 트레블 월렛 카드를 읽어내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또 다른 ATM을 찾아 떠났다. 다행히 또 찾아낸 ATM기에서 카드는 먹혔으나 인출 수수료를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300페소(한화 7500원)
What?!!!!!!!
듣고 보도 못한 수수료다. 다행히 내게 예비로 가져간 카드가 있었는데 그걸 넣었더니 수수료가 대폭 삭감되어 18페소로 나왔다. 휴우...
필리핀은 현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다. 숙소 근처에 어느 ATM 수수료가 쌌는지 미리 알아두고 현금을 넉넉히 뽑아두는 게 좋다.
무엇보다 트레블 월렛카드만 믿고 있다가 수수료 폭탄을 맞을 수도 있으니, 여분의 인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나는 우리 EXK 카드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현금을 들고 다시 맥도널드로 복귀했다. 결제를 하는데 직원이 거스름돈 3페소가 모자라서 지금은 줄 수 없겠다며 내 영수증에 3페소라고 커다랗게 적어줬다.
어쩌라고? 다음에 잔돈 찾으러 오라는 뜻인가. 그렇게 현금을 고집할 거면 잔돈을 넉넉히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잔돈도 없음서 현금만 내라는 건 뭐여.
공복에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쌀밥 생각이 간절했다. 감사하게도 필리핀 맥도널드 메뉴에 밥이 있었다. 스테이크 앤 라이스를 시켰다.
양송이수프에 함박스테이크 넣고 밥 비벼 먹는, 우리가 아는 딱 그 맛이다.
길 건너의 메트로 슈퍼마켓으로 가서 당장 생존에 필요한 생수, 쌀, 계란, 세탁세제를 구매하기로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소형 홈플러스 정도의 규모다. 대략적인 막탄 뉴타운의 물가는 다음과 같다.
6.6리터 생수 한 통/ 91페소 (약 2200원)
유기농 계란 한 판/ 210페소(약 5250원)
쌀 2킬로/ 126페소(약 3150원)
가루세제/ 250.40페소(약 6250원)
산미구엘 1병/ 48페소(약 1200원)
장 본 걸 그대로 짊어지고 바로 그랩을 잡아 짐 찾으러 공항에 갔다. 그 와중에 그랩 기사분께 망고를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물어봤다.
경험상, 현지 맛집이나 과일 가게에 대한 정보는 현지 택시 기사분께 물어보면 제일 정확하다. 기사분은 마침 공항 가는 길에 과일가게가 있다며 잠시 내려서 사라고 배려해 주셨다.
망고 1킬로(중과 3개) 190페소(약 4750원) 수박 1/4 100페소(약 2500원)
잃어버린 짐 찾으러 가면서 장보고, 과일사고, 짐을 더 많이 만들어 온 우리. 공항 가면 분실물 센터 같은 데서 후딱 짐을 찾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장작 3시간에 걸친 다단한 절차와 오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이럴 땐 그냥 'Interesting!' 하고 넘어가면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다고 한다. 한번 써먹어볼까?
Interesting!
여행이며 인생은 늘 불확실성의 연속이기에 이런 해프닝들에 일일이 스트레스받으면 오래 살기가 힘들다.
먼저, 우리가 올 때 이용했던 세부퍼시픽 항공사 데스크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난감해하며 지금은 공항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한 시점에만 수하물 창고에 접근할 수 있어서라고 했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세부퍼시픽 홍콩발 비행기를 1시간 반 정도 기다린 것 같다.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수하물 창고 입구로 갔는데 그곳에는 나 말고도 잃어버린 수하물을 찾는 각국의 여행객들이 이십여 명 대기하고 있었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내 여권을 카피하고 나니 또 기약 없이 기다림이 이어졌다.
40여분 후, 드디어 수하물 창고로 입성할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내 빨간색 배낭이 딱 보였다. 무사했구나.. 그런데 내 배낭은 밤새 뭔 일이 있었는지 까만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가방을 얼른 챙겨 들고나가려고 했더니 또 기다리란다. 가방 찾았는데 왜 또 기다리지?
뭐가 오류가 있는지, 상사로 보이는 분이 나를 안내한 직원을 막 혼내면서 종이 서류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액으로 일일이 고치고 있었다. 상사분은 상당히 짜증이 났는지 계속 궁시렁 거리면서 그 직원을 갈궜다. 입국할 때는 그렇게 큐알코드를 따지더니 짐 찾을 때는 종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하나하나 고치고 시간을 소요하는 모습에 조금 킹 받았다.
그렇게 가방을 들고 20분을 대기했다가 이제 진짜 가려고 하는데 출구를 코앞에 두고 직원이 또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다.
What?!!
한 손에 또 그 종이 서류를 들고 있다. 아직도 절차가 남아있나? 그놈의 절차! 종이 서류!!! 이제 진짜 질린다 질려!. 아, 아니다.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니까 다시 한번 상기한다. Interesting!
더운데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언니와 아이들을 생각하니 속에서 왈칵 뜨거운 게 올라왔다.
".... Can I go now please..?!!"
직원은 시멘트색으로 변해버린 내 심각한 낯빛을 보고 더 붙잡고 있었다가는 멱살을 잡힐 것 같았는지 갑자기 얼른 가라고 했다.
입국 순간부터 너무 힘들었던 여행 첫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수영장에 들어가서 열을 식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덕분에 공항 수하물 창고 구경도 했고, 여행 갔다 와서 풀 수 있는 썰도 하나 생겼고, 영어 리스닝, 스피킹 실전 연습도 많이 했잖아...
저녁엔 한국에서 싸 온 곱창김, 매운 고추장아찌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달랬다.
숙소에는 자잘한 문제가 많았다. 수압이 약했고 에어컨에서 물이 줄줄 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온수였다. 온수가 안 나온다고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온수는 원래 안 나온다고 했다.
What?!!!!!!!!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에어비앤비 숙소설명을 다시 찾아보니 정말 온수는 없다고 나와 있다.
세부에서는 온수 또한 당연한 게 아니었다. 이럴 때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하는 단어.
Interesting!(-_-)
너무 좋은 기회인걸. 언제 냉수 샤워를 해보겠냐고.
덕분에 몸에 좋은 냉수마찰을 매일 할 수 있게 됐다.ㅠㅠ
여기 와서 절실히 깨닫는 사실은 세상에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맥도널드의 카드결제도, 빠른 서류 처리도, 숙소의 온수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은 내가 누리고 있던 혜택이자 축복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속해 있었던 세상에 새삼 감사하며 저녁 간식을 먹고 스토브 리그로 하루를 마감한다.
해외살이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장보기다. 그래서 보통 현지 마트에 나오면 텐션이 올라가게 마련인데 이곳 마트는 이상하게 덥고, 조명도 어두컴컴한 것이 기분을 쳐지게 하는 기운이 흐른다. 가보면.. 안다.
병으로 된 피처는 첨 봤다. 우리나라로 치면 맥주피처다. 지친 하루의 끝은 산미구엘 한잔으로 마무리. 우리는 보통 필리핀 현지 맥주라고 하면 산미구엘을 떠올리지만, 막상 와보면 산미구엘 말고도 종류가 많다. 그중에 레드홀스라는 맥주가 평이 좋은 것 같다.
무계획으로 다짜고짜 시작한 세부살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이렇게 하루가 간다. 다음날엔 뭘 할까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되고 불안하고 조금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