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의 조화, 자연스러움의 진수

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by 복수초


방문일자 2023.01.08


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간 경주로 답사 여행을 다녀왔다. 문화재 덕후로서 경주는 보고 싶은 문화재들이 너무나도 많은 환상적인 지역인데, 학창 시절에 경주를 제대로 답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입시가 끝나고 20살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여행하고 싶은 지역이 바로 경주였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고 20살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경주 여행으로 알차게 시작해 보았다.

여행 첫날인 8일에는 경주 북부를 둘러보았고,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은 경주 남산만 집중적으로 답사하며 남산에 산재한 석불, 마애불, 그리고 석탑을 두 눈에 담아보았다. 마지막날인 12일에는 가볍게 태종무열왕릉비만 보고 집이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석조문화재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첫날 둘러본 경주 북부는 통일신라의 문화재들로 가득한 경주 중심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지역이다. 양동마을, 옥산서원과 같이 조선시대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들이 있는 곳이 바로 경주 북부이다. 첫날의 여행 코스는 '흥덕왕릉 -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 - 양동마을 - 옥산서원 - 독락당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었다. 이 모든 답사지를 글 하나에 담으면 분량이 너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위치상으로 굉장히 가까운 옥산서원, 독락당, 그리고 정혜사지 십삼층석탑만 이 글에서 함께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흥덕왕릉, 회화나무, 그리고 양동마을은 나중에 다뤄볼 예정이다.




옥산서원 (玉山書院)

양동마을을 실컷 보고 나서 오후 4시경 옥산서원에 도착했다.

사적으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로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1곳으로, 선조에게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을 받은 비 훼철 사액서원이다.

정겨운 맛이 느껴지는 역락문.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무변루. 비 훼철 사액서원의 초기 문루로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무변루를 지나면 나오는 중심공간. 구인당(강당)을 중심으로 왼편에 암수재(서재), 오른편에 민구재(기숙사)가 자리한다.
구인당(강당)을 장식하는 현판들이 멋스럽다.
구인당에 올라서서 바라본 무변루의 모습. 슬슬 산 너머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겨울 해가 서원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비교적 늦은 시간에 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 매우 고요한 분위기에서 서원을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 빠르게 지는 겨울 해가 마지막 빛을 발산하는 시간대에 서원에 가니 겨울 햇살이 목조건축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가득 받을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 듯하다. 일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독락당으로 향했다.




독락당 (獨樂堂)

오후 4시 40분경 독락당에 도착했다. 옥산서원 앞을 흐르는 맑은 옥산천을 따라 700m 정도만 걸으면 독락당에 이른다. 서원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다다르는 곳이기에 사실상 옥산서원과 같은 곳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옥산서원이 독락당 근처에 지어진 이유는 독락당이 회재 이언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인데, 독락당은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사랑채이다.

독락당(사랑채)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놓았는데, 사랑채에서 이 창을 통해 냇물(옥산천)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또한, 독락당 뒤쪽에 위치한 정자인 계정(溪亭)에서는 냇물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담장의 살창과 계정을 통해 자연에 융합하려는 이언적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정문(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향하는 길. 협문과 담장의 조화가 푸근하고 고풍스러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독락당(사랑채) 전경. 오른편 담장에 보이는 살창이 독락당 공간구성의 핵심이다.
독락당(사랑채) 내부. '옥산정사' 편액과 '독락당' 편액의 글씨가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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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는 독락당 담장의 살창
독락당 뒤쪽에 위치한 정자인 계정(溪亭)에서는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냇물(옥산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단아한 계정의 모습. 물이 많았으면 더욱 예쁜 풍경이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전통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도라고 생각한다. 냇물과 계정, 그리고 담장의 조화가 아름답다.

옥산천과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인 독락당이었다. 독락당의 의미가 '혼자서 즐기는 집'이라는 뜻인데, 이 집에서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며 홀로 즐거운 노년을 보내는 이언적의 모습이 절로 상상되었다. 독락당을 보고 나니 일몰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서둘러 이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淨惠寺址 十三層石塔)

오후 5시 20분경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 도착했다. 독락당에서 400m 정도만 더 걸어가면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 나온다. 시간상으로는 5분만 걸으면 도달하기 때문에, 독락당까지 왔으면 무조건 이 탑도 함께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정혜사지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매우 독특한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국보로 지정된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고즈넉한 원경. 주변 산세와 탑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1층을 크게 부각한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진다.
땅거미가 진 시간대에만 드러나는 석탑의 실루엣. 개인적으로 석탑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대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아담하고 단아한 맛이 있는 석탑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땅거미가 지는 저녁시간에 이 탑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매우 행운이었다. 석탑의 실루엣은 땅거미가 진 시간대에만 드러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실루엣이야말로 석탑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주여행 첫날이 저물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그리고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주변 풍광과의 조화가 정말로 인상 깊은 곳들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비 내린 다음 날에 독락당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계정에 앉아서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내가 조선시대 선비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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