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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25. 2024

거대 나무 ... 내려가기(2)

꿈해석 에세이




꿈 제목 - 거대 나무 내려가기
꿈 이미지 - 정상, 절경, 모래해변, 바다, 갯바위, 어촌마을, 천국, 윤슬, 어둠과 빛, 해수욕, 태양, 텐트, 수박, 여자아이, 사진, 아내, 앵글
꿈 감정 - 아늑, 절경, 천국, 밝음, 평온, 여유, 배려, 사랑

가장 먼저 정상에 도착한다. 새 둥지처럼 아늑하고 평평한 나무 데크가 나타난다. 탁트인 시야에 바다와 새하얀 모래해변, 갯바위, 작은 어촌 마을이 완벽한 구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치일 것이다.내려가는 길은 짧고 완만하다. 모래가 뒤덮힌 푹신한 길이 해변까지 이어진다. 해변으로 한 달음에 내려가니 윤슬이 수줍게 반짝이고 있다. 우윳빛 모래와 에매랄드빛 바다가 눈부심을 겨루고 있다.

나무로 오르는 길이 어둠의 세계라면 그 너머는 빛의 세계다. 가족과 연인 단위로 온 사람들은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텐트 앞에서 자기 머리통보다 큰 수박을 껴안고 먹고 있는 귀여운 여자 아이에 시선이 고정된다. 귀여운 아이와 함께 아내가 앵글 속에 함께 들어 있다. 나는 바다 속을 유영한다. 숨을 쉬지 않아도 숨을 쉰다. 귀 밑에 아가미가 물속 산소들을 부지런히 필터링해서 모으고 있는 중이다.




고향바다 ... 죽음의 공간

꿈에 고향 마을 앞바다가 자주 나타난다. 바다 빛은 언제나 회색이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의 부음이 들려오는 곳. 처절한 생존과의 사투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할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뱃사람이 되지 않겠다며 고향을 떠나 군인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낯선 타인을 환대하는 법을 몰랐다. 말수가 적었고, 타인의 진심을 의심했다. 고된 바닷노동을 술로 달랬고, 나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나중에 어떤 책에서 읽은 사실인데, 뱃사람들의 적은 바다가 아니라, 한 배를 탄 사람이라고 했다. 오해, 불통, 증오... 완벽한 살인이 가능한 사방이 뚫린 폐쇄된 공간 배. 그 곳에서 사회적 권력은 무의미하며 동물적 힘의 권력만 지배한다.) 자주 싸웠다. 당신 안에는 두려움과 연약함이 꽁꽁 숨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생존 DNA를 물려 받았다.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터로 갔다. 할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고 바다를 피해 도망친 곳이 죽음의 잔치판이었다.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내 꿈속에서의 바다는 언제나 그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고, 집채만한 파도를 품었다.


나는 고향 마을 앞바다에 들어가 본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정박 중인 뱃머리에서 동네 아이들은 바다가 놀이터인 양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단 뛰어 들어봐. 안 죽는다니까. 수영은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삼촌이 내 등을 쓰윽 밀었다. 찰싹! 내 배와 얼굴이 바다 면을 때렸다. 물속에서 살기 위해 쉰 숨은 날숨이 아니라 들숨부터였다. 크억! 들숨은 죽음의 숨이었다. 코와 입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날 나는 바닷물이 엄청 짜고 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삼촌은 귀한 손자 죽일 뻔했다며 할머니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다. 나를 바다로 밀어넣은 것도, 죽음에서 건져낸 것도 삼촌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 나는 물가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된다.




물 ... 생명의 시원

나는 물을 무서워했고 마흔이 넘어서야 수영장에서 수영을 처음 배웠다. 생존을 위한 수영이 아니라, 어느날 우아한 수영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불탔다. 유튜브에서 50m를 단 아홉번의 스트로크로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유영하는 걸 보고(나중에 'Total Immersion'이라 불리는 장거리 수영법임을 알았다.) 첫 눈에 그 영법에 매료되었다. 지금은 그 영법을 제법 구사한다고 믿고 있다.


수영 초보 때, 내가 과연 물에 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바보 같았다. 물에서 뜨기보다 가라앉기가 더 힘들다. 물에 몸을 내맡기면 죽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무거운 철학적 명제인 양 유레카를 외치며 수영장을 나왔던 강습 첫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물속에서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삶에 유영하면서 자유하는 법을 물이 가르쳐 주었다.


"한 여인의 출산을 도와 주었던 밤에 나는 깨달았다. 최고의 고통과 최고의 쾌락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양수에서 나온 아기를 처음 보았다. 딸과 아들 탄생의 순간을 함께 했다. 고통과 환희, 생명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풍경의 생경함에 당황했었다. 태아는 숨을 쉬지 않고 물속에서 10개월을 자란다. 공기가 강제로 잠자는 허파를 깨운다. '생명의 탄생'이라 부른다. 생명의 시원은 공기가 아니라, 물이었다는 걸 분만실에서 깨달았다. 내가 두 아이의 탯줄을 잘랐다. 물의 세계와 작별하고 공기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축하했다.

물이 강제로 허파를 무용하게 만들었던 최초 바다 입수 경험은 임사 체험이었다. 바다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나는 물의 세계를 잠시 잊고 있었노라고.




환희 ... 다시 되찾은 꿈속 바다

꿈속에서 바다 이미지가 밝아졌다. 이 꿈을 꾼 날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힘겹게 오른 거대나무 위에는 바다가 있었고, 아내가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바다라기보다 호수에 가까웠다. 바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건 파도가 없는 청량한 파도 소리 때문이었다. 쏴아, 쏴아, 철썩...


살아가는 건 내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본래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막막한 어둠속에서 신에게서 부여받은 이미 정해진 몸과 마음을 밝은 세상으로 끄집어 내는 일이다. 본성의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으로 생은 마무리된다.


인간의 내면은 변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을 당황시키는 모습도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갑툭튀 자아'는 임계점을 넘어선 현상일 뿐이다. 자아가 변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자아를 알아가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온전한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삶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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