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의도 같은 게 그렇게 중요한가? 독자의 의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다음 중 저자의 의도가 아닌 것은?' 같은 문제를 출제해야 하고 풀어야 하는 한국 중고교 국어 교육 현장도 슬프고 불행하다.
-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중에서
선생님, 소설의 주제가 뭔가요?
작가는 기자들이 주제를 묻는 질문에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한다. 자신이 기자였기에 기사를 쓰기 위한 직업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한 것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작가의 것이 아니니 당신 의지대로 해석하라가 맞는 말이지만, 무성의해 보여 작가는 그럴 수 없다.
독자의 의지대로 답하면 망한다. 적어도 한국 중고등학교 국어 시험문제에 답을 할 때는 진리다. 정작 교사인 나부터 문학을 자기 의지대로 해석하면서, 수업시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지독한 모순이다.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 하면 인간은 괴롭다. 분명히 이게 맞는데 저렇게 행동하라 하면 인간은 미친다. 20년 국어교사로서의 고충이었다.
"얘들아, 국어는 원래 오지선다로 시험칠 수 없는 과목이야. 그럼에도 시험은 엄연히 쳐야 하잖아. 시험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지금 할 수 없으니 잠시 접어두고... 국어 오지선다에는 암묵적인 약속이란 게 있어.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니 다섯 개의 선택지 중에서 확률적(이럴 땐 수학 용어인 확률이란 용어가 제법 유용한 단어다)으로 가장 가깝거나 먼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분석 능력이 중요해."
언뜻 듣기에 그럴듯한 대답처럼 들리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다.
이쯤 되면 아이들은 투쟁을 포기한다. 그냥 주제를 외운다. 공부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국어보다 명쾌한 수학을 더 좋아한다. 학교에서 수학은 투쟁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이들 성향에 따라서 국어 선생님은 피곤한 사람이거나, 너무 좋은 선생님(아이의 성향이 맞으면)이다.
그래서, 너의 생각은 뭐니?
오지선다의 한계를 수행평가가 보완하기는 한다. 거의 모든 과목의 수행평가는 결국, 글쓰기로 귀결된다. 보고서, 감상문, 활동지 등 종이에 뭔가를 손으로 기록하여 쓰는 활동으로 마무리 된다. 글쓰기는 아이들 입장에서 힘들지만, 교사 입장에서는 많은 이점이 있다. 우선 기록물로 남겨서 당장 해치워야(역할, 행동, 태도, 관찰 등은 미룰 수 없이 실시간으로 해결해야) 할 업무로서의 부담이 줄어든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중에 학생생활기록부의 좋은 근거 자료가 된다.
학생 입장에서 특정 시기에 몰리는 수행평가의 글쓰기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초중고등학교 생활에서 이렇게 많은 글을 쓰면 좋은 작가나 논문 잘 쓰는 학자가 쏟아져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의 수행평가지를 받아보면 글쓰기 교육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절반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독 자체가 불가능(정상적인 자모음의 꼴을 갖춘 글자체가 거의 없다. 키보드 자판, 마우스 클릭, 스마트폰 터치에 익숙해서 그럴 것으로 추론함)하고, 나머지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배껴쓴 듯한 줄거리 중심의 글이다.
"이번 국어 수행평가 글쓰기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중심으로 쓰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만으로 글을 채우는 기준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과 생각의 문장들로 채워진 반짝반짝 빛나는 숨은 보석을 반드시 만난다. 그렇게 발견한 문학 소년소녀들은 글쓰기반 스카웃 일순위다. 어쩌면 그 시절의 문학소년이던 나를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바랐던 욕망이 이 아이들에게 투사된 것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