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위 Feb 01. 2024

밀린 '무위록' 쓰기




하루종일 <2023> 제본책을 읽었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아내와 제주도에서 책방투어를 하고 있었다.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톡문자를 보냈다. 자화자찬 하고 싶어서.


"여보, 작년 일기 1월 제주도 책방투어 한 거 읽어 봤어?"

"생각보다 재밌는데..."

"내가 썼지만 나 좀 대단한 듯~ ㅋㅋ"

"놀라운 건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썼다는 거. 현장감 쩔어."




오늘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를 용기내어 브런치에 가공하지 않고 올려 본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 중에 일부는 일기의 어느 귀퉁이에 써놓았던 문장들이 약간은 가공되고 살을 붙여 쓴 글도 있다.


어제(2024.1.31.수) 있었던 일을 오늘(2024.2.1.목) 일기에 적는다. 이름하여 밀린 일기 쓰기. 초등학생 때 밀린 일기쓰기는 그야말로 거짓말 일기였다. 오늘 일기는 어제 있었던 일을 오늘 날짜에 쓴 것이니 '거짓 일기'는 아니고 '밀린 진실 일기'이다.




2024.2.1.목

어제 일을 오늘 적는다.

10시, 양산부산대병원 소화기센터
주치의가 1년만에 돌아왔다.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푹 잘 쉬고 돌아왔구나. 안심이 되었다. 그땐 누가 봐도 내가 환자가 아니고 당신이 환자였으니까. 실수를 연발하며 사과하던 당신을 보면서 지난날의 내가 떠오르더군요.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몸을 돌보는 당신을 보면서, 자기 마음도 챙기지 못하면서 학생들 마음을 챙기는 보람으로 살았던 나를 보았지요. 자의든 타의든 당신의 선택은 옳았어요. 당신이 환자에게 조금 더 친절하면 좋겠다는 내 생각은 나만의 욕심이겠지요. 어쨌든 피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예요.

11시, 약국가는 길
진료를 끝내고 키오스크에서 차량 출차 정산을 하려는데 환자 바코드가 인식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주차비 1800원을 결재했다. 로비안내원에게 이유를 물으니 차량 등록이 안 돼서 그런거라고 했다. 요금 정산원에게 얘기하면 등록하고 처리해 줄거라고 했다. 주자장 정산원에게 차량 등록을 해달라고 했더니 이미 결재해서 지금은 안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 다음에 하기로... 기록하지 않아도 될 사사로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아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내가 있었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을 텐데... 아, 마누라가 보고 싶다.

12시 30분, 기아오토큐 정비소
엔진오일 (45,000Km) 교환, K5 리콜 수리, 일반 정비(브레이크, 타이어, 냉각수, 워셔액) 요청. 점심시간이라 차 맡기고 본가로 가서 아버지와 떡만두국으로 점심 식사.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선우는 방학인데 뭐 하냐!" 질문도 아닌 것이, 억양이 세서 질타의 의미로 들렸다. "공부하지요." 짧게 대답하고 만다. 사랑의 순서가 틀렸는데요, 아버지. 아무런 사랑의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손자가 스스로 달려와서 할아버지하고 안기는 법은 없답니다. 내가 당신에게 달려가 안기지 않았듯이요.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나 또한(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아들에게 더더욱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을 뿐 발설하진 않았다. 우리는 왜 이런 인간들일까요.

6시, 희연재활병원
장인, 아내와 장모 병문안 갔다. 방수패드도 깔려 있지 않고, 가래가 역류해서 가슴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엄마를 보던 아내는 속상해(정확히는 화가 났다) 했다. 아내는 헐어서 연고를 바르고 선풍기로 말리면서 상처 부위를 내게 보여주며 내 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예상보다 심해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몇 가지 내 의견(당연히 의학적 의견은 아니고 시스템과 우리의 마음에 관한)을 말해 주니 안심했다. 사위가 장모의 치부를 본다는 것은 당신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딸인 아내는 내게 상처 부위를 보여주었다. 아내는 내게 의지하고 싶구나, 아빠와 오빠가 있지만 그들보다 내 말에 더 기대고 싶어하는구나를 느껴서 고마웠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오는 장모 병문안 시간의 피로에 대해 생각한다. 시간이다. 저녁 6시부터 8시. 하루 일과 중 내겐 가장 힘든 시간. 저녁을 먹고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무기력이 극치에 이르는 시간이다. 환자를 보면서 내가 더 환자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는다. 티내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쓴다. 장모와 나는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환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게 약간의 위안이다.

9시, 자취방
'백일백장' - '무위록 사용설명서'를 썼다.
'무위록 사용설명서' 쓰느라고 어제 일이 오늘로 미루어진 거였다.
사건의 과거와 현재는 뒤바뀌어 있지만, 생각은 순차적으로 정리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위록 사용설명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