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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31. 2024

무위록 사용설명서

일기를 재정의 하다





물이 흘러서 강이 되고 사람이 걸어서 길이 된다. 마라톤 주자가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기실 불안한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절 북한산 등반을 끝마치고 내려와서 하늘에 걸려있는 봉우리들을 되돌아볼 때의 감개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제 발로 넘은 우람한 봉우리들을 바라볼 때 대견함은 귀중한 것이다. 몇 시간의 등산도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가 살아온 저 산봉우리처럼 선명하게 하늘에 걸어 놓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대견함에서 얻는 힘은 어떤 것인가.
- 신영복 유고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중에서




<2023>, 일기 제본책이 도착했다. 필력은 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편집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다. 세상에서 단 한권만 존재하는 책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를 위한 책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책이길 바란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릿문장, 패러디)


<2023> 하나의 길을 완주하였다. 내게 쓰기는 과거를 돌아보는 불안의 몸짓이 아니다. 내 발로 직접 디뎌서 넘은 작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경건한 행위다. 내가 살아온 소소한 봉우리들이 차곡차곡 책꽂이에 꽂힌다. 그 대견함의 힘으로 <2024>도 계속 쓸 것이다.




나의 일기를 '무위록'이라 칭한다. 쓰기 원칙을 정리해 보면,


해가 바뀌면 이전 년도 일기를 반드시 종이책으로 만들 것 ('하드표지 제본:벽돌책'이 아니면 너덜너덜 떨어질 것이다. 가상공간은 글이 실존하지 않고 떠돌다가 사라지지만, 종이책의 물성은 반복해서 보게 되면서 의미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장된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 (지인들 중에서 호기심이 생겨 가끔씩 빌려가서 읽는 이도 있다. 하지만 아내는 잘 안 읽는다. 문장들이 무거워서 무섭다는 게 이유다. 최근에는 글이 조금 밝아졌다며 환영한다. 아내를 배꼽잡게 만드는 유머 넘치는 문장에 도달하는 게 최종 목표다)


배설의 언어를 쓰지 않을 것 (감정 객관화 연습에 최고의 방법이다. 배설의 언어를 쓰는 순간 일기는 자물쇠로 걸어 잠궈야 한다)


공감과 공유의 글쓰기로서 타인을 향해 나아갈 것 (매일 써서 일기일 뿐, 사실상 매일 쓰는 단상집 또는 에세이집에 가깝다)


단 한 문장이라도 쓰고 내일을 맞이할 것 (밀린 일기 쓰기도 생각보다 유용하다. 시간이 각진 모서리를 깍아 주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쓰되 다듬고 정제된 언어를 쓸 것 (문장과 사유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한다. 긴장을 놓치는 순간 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다)


사건 기록보다 사유의 흔적에 비중을 둘 것 (개인 사건은 타인에게 흥밋거리가 못 된다. 때로는 깊고 집요하게 사유하고, 때로는 깃털처럼 가볍고 황당하게 상상한다)


작정하고 자세 잡고 쓰기보다 생각과 느낌이 올라오면 바로 쓸 것 (원샷원킬! 마치, 킬러처럼! 실천의 핵심이다. 자신에게 맞는 접근성과 휴대성 좋은 기록 도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나의 경우 '에버노트'앱을 쓴다. 아날로그보다 디지털 도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게 좋다. 수십년 동안 거의 모든 메모 수단을 써봤지만 접근성과 휴대성이 떨어지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출판물을 쓰는 자세로 쓸 것 (에세이, 소설, 계발서의 한 챕터를 쓰듯이 쓴다. 이때, 내용보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자기만을 위한 비밀글이 아닌, 타인을 향한 글쓰기의 전단계 훈련이면서, 책쓰기 전초 기지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간결하고 쉽게 쓰고 멋지게 쓰려고 애쓰지 않을 것 (오감을 열어두고 감각에 의존해서 써야 한다. 쓰다보면 자신만의 말투를 발견하게 된다. 이름하여 문체의 발견!)


책과 영화 등의 매체를 적극 활용하고 출처를 반드시 밝힐 것 (나중에 저작활동 자료로 쓸 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 강의, 수업, 발표, 또는 잘난 체 할 때 내 생각을 즉시에 써 먹을 수 있다)


여행 기록은 정보보다 자신만의 느낌, 사유, 사람에 더 집중할 것 (정보는 인터넷에 차고 넘치므로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장소 명칭, 고유명사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인물 관찰과 관계에 관한 서사에 중점을 둘 것 (자서전과 같은 개인 서사는 사건이 아니라, 그가 만났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정체성은 사람에서 생겨난다는 원칙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면서 핵심이기도 하다. 꾸준히 하다보면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과 눈이 생기며, 인간애가 샘솟는다)


소설과 시의 문학적 기법 활용할 것 (대화, 묘사, 상징과 비유, 필요에 따라 약간의 가공도 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소설쓰기 연습이 된다.)


사진은 직접 찍은 것을 사용하고, 칼라 제본을 고집할 것 (칼라 제본은 비싸지만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미지가 글 전체를 상기시키는 상징성을 지니므로 돈 이상의 값어치를 충분히 한다)


전날 쓴 일기를 다음날 한 번은 읽어 볼 것 (일기 퇴고는 한번이면 족하다. 하지만 한번은 반드시 하는 게 좋다. 문장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거친 생각과 비문을 허용하지 않으면 피곤해서 지친다)


동네 책방 열 때, '시그니처 북'이 될 것! (30권 이상 꽂혀 있으면 장관일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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