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을 꾸건, 무슨 일을 하건 멋진 역할 모델이 있으면 좋다. 그와 나의 닮은 점을 꼽으며 용기를 얻고, 그와 내가 닮지 않은 점을 살피며 나의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 혹은 지켜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조지 오웰과 닮은 점 찾기'는 나의 심심풀이 유희가 되었다(닮지 않은 점이 더 많은 건 나도 잘 안다).
-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중에서
롤모델
누군가 내게 '롤모델 작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없다. 나는 특정 작가의 출간 책들을 모조리 읽어버리는 방식으로 독서를 한다. 작가가 창조한 예술작품 이전에, 새로운 인간 유형을 만나려고 책을 읽는다. 너무 많은 작가가 나를 지나쳐 갔기 때문일까, 그 수많은 작가들 중 제대로 아는 작가가 없어서일까,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너무 많아서 일까... 아무튼 롤모델을 딱히 댈 수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의아하다. 이제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차에 장강명 작가의 근간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만났다.
얼마전 우리 동네 책방 북토크에서 장강명 작가와 처음 대면했다. 나는 그를 롤모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책과 글이 내 주변에 많이 스며들어와 있었다.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그의 책쓰기 저작 <책 한번 써봅시다>의 표지 사진을 3년 동안 바꾸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그보다 먼저 <한국이 싫어서>를 많은 작가들 책에서 언급하길래 도대체 어떤 책이지하는 호기심이 생겨 대출하려고 도서관 갈 때마다 대출중이어서 실망하고 돌아서던 때도 있었다. 그의 책을 모조리 읽는 적극성도 생기지 않아서 안 읽어 본 책이 더 많았다.
큰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북토크 자리에서 만난 느낌은 내 기대치를 넘었다. 어, 이 인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점이 좀 많은 것 같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낯선 독자를 대하는 사려깊은 태도가 마음을 끌었다. 희귀한 남자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반대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가 더 많다. 그날의 좋았던 느낌 때문에 그의 책들을 하나둘 찾아 읽고 있는 중이다. 장강명 작가를 롤모델로 삼아 보자는 의지(좋아하는 걸 의지로 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웃기지만 재미있는 도전같다)로 그를 탐구 중이다. 억지로 '닮은 점' 몇 가지를 찾았다.
그는 어떤 긴 작업을 혼자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왜 하는지, 왜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달리 없다. 그걸 남한테 설명하다 보면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왜냐하면 대체로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고, 의도와 결과물도 딴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설명해줘도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가면을 쓰고 살게 된다.
-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중에서
저널리스트와 소설가
직업적 특성이 글쓰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기자 특유의 풍부한 자료 기반의 글쓰기, 사회에 대한 관심,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차가운 문체 등이 특징적이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할 말 다하는 용기, 시크하게 날리는 비판 속에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억지로 꾸미지 않으려는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이 매력적인 작가다. 약한 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너무 깊어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티나지 않는다. 그런 모습에서 나를 본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IMF 구제금융이 나를 교사의 길로 이끌었다. 만약 기자의 길로 갔다면 장강명 작가처럼 얼마 못가서 때려치우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장강명 작가 만큼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가능성은 글쎄다)이 높다. 나를 교사의 길로 이끈 운명은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국어 교사의 길 또한 후회가 없을 만큼 내게는 직업적 만족도가 높다. 내가 원했던 모든 것(문학, 작가, 독서, 방송, 영화, 음악, 예술,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교사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다 이루었으니까 성공이라 자체 평가내릴 수 있다.
장강명 작가에 대한 끌림은 소설에 대한 열망이다. 나는 에세이스트보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평생 소설을 읽으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쓰지는 못한다. 쓰지 못하는 이유를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다. 소설을 쓰고 싶은 건 단순한 로망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소설의 양식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정도가 전부다. 장강명과 조지오웰처럼 SF 분야는 아니지만,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상상과 미래를 기반으로 한 학교와 인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 정도는 될 것 같다(장강명의 말대로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푸시하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가하는 압박 정도는 되겠다).
내가 '장강명과 닮은 점 찾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조지 오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코끼리를 쏘다>라는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었다. 조지 오웰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고, 브런치에 '조지오웰의 총에 코끼리는 왜 죽어야 했을까? - 폭력의 매커니즘에 관하여'*를 썼었다. 시시콜콜함 속에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는 그의 글에 매료되었다.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막연한 '워너비'가 생겼다. 이제 장강명 작가가 나의 '워너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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