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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Sep 27. 2021

조지 오웰의 총에 코끼리는 왜 죽어야 했을까?

…폭력의 메커니즘에 관하여




싸움의 기술


나는 독하고 고약한 결심을 했다. 녀석이 방심하고 있을 때 때려서 앙갚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1분쯤 기다렸다가 최대한 악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헤일에게 다가갔다. 그런 다음 온몸의 힘을 주먹에 실어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녀석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입에서 피가 흘렀다... 이상하게도 녀석은 그 자리에서 나를 다짜고짜 팰 수 있었는데 가만있었다...
나의 그런 행동은 헤일의 기준뿐 아니라 내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었다. 불시에 때린 것도 잘못이지만, 싸웠다가는 녀석에게 얻어터질 걸 알고 나중에 싸움을 거부한 건 더 나쁜 행동이었다. 그건 비겁한 행동이었다... 나는 단지 무서워서 거부했다... 내가 주먹을 날린 건 일순간의 무분별한 폭력이었다... 그것은 적잖은 만족감을 주는 일종의 범죄였다... 내가 이 사실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달은 건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난 뒤였다. 당시 나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가 처한 도덕적 딜레마를 초월해서 보는 능력이 없었다. 내가 못 본 건 이런 가르침이었다.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
나는 그런 경우 약자에게 자신을 위한 새로운 법칙을 만들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남자아이들만 있는 세계에 살았다. 남자아이들은 무리를 짓기 좋아하고, 어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강자의 법칙에 따르면서 자신이 당한 굴욕을 더 약한 존재에게 그대로 되풀이하는 방법으로 설욕했다... 대개의 아이들보다 반항아의 기질이 더 강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아이들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더 가난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감상적인 반항만 했을 뿐, 지적인 반항은 한 번도 못했다. 내 편이라고는 나의 맹목적인 이기주의, 무능함(자기멸시를 못하는 무능함이 아니라 자기혐오를 못하는 무능함), 그리고 생존본능밖에 없었다.
- 조지 오웰 에세이 <코끼리를 쏘다> '너무나 즐겁던 시절'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싸움에서 이겨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이들 싸움의 승패는 코피 터지는 걸로 결판 나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냥 서 있어도 코피가 자주 터지곤 하던 약골이었다. 남자 아이들의 세계에서 싸움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유리코였다. 똑같이 한 대씩 때리고 맞아도, 스치기만 해도 나는 코피가 터졌다. 그리고 싸움은 종결되었다. 나는 더 싸울 수 있는데… 녀석을 때려 눕힐 수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버지 때문에 전학을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1년에 두 도시를 옮겨 다녔다. 전학 온 뜨내기는 싸움 서열을 빨리 찾아야 했다. 텃새에 멋지게 맛을 보여 주는 전학생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골 레퍼토리다.

내게도 그런 영웅적 스토리가 하나 있다. 나는 싸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싸움할 일을 거의 만들지 않고 피했다. 남자 아이들의 세계에서 싸움은 피할수록 서열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피라미드 사슬의 맨 아래 채식동물로 전락해야 한다. 명분은 평화주의자지만 현실은 싸움 못하는 찌질이였다. 전학은 평화주의를 고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날은 미리 초대된 싸움이었다. 부산 초읍동 달동네, 그것도 맨꼭대기 단칸방 사글세가 우리집이었다. 경사진 달동네 골목길에 아이들 여럿이 모여 있었다. 싸움을 걸어온 아이의 친형으로 보이는 덩치 큰 형도 상대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싸움의 이유는 사소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경사진 골목에 지대가 높은 곳에 녀석과 형이 자리잡고 나를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시작부터 내게 불리했고 나는 두려웠다. 먼저 선방을 날리지 않으면 이 싸움의 승산은 없었다. 나는 높은 지대로 올라가려고 말싸움부터 시작했다. 녀석과 눈높이가 비슷해졌을 때 주먹을 먼저 날렸다. 아마도 나는 눈은 질끈 감은 채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퍽", 녀석은 "억" 하는 짧은 비명과 얼굴을 감싸 쥐고 뒹굴었다. 운 좋게 내 주먹은 녀석의 얼굴에 명중했다.

멈출 수 없었다. 멈칫하는 순간 더 큰 앙갚음의 주먹이 나의 얼굴을 향해 날아올 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올라탄 채로 얼굴을 향해 연신 주먹을 날렸다. 아마 그 순간 나는 폭력과 접신을 했을 것이다. 나는 무서워서 때렸다. 살고 싶어서 더 세게 때렸다.

보고 있던 녀석의 형이 싸움을 뜯어 말렸다. 동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형이 동생의 앙갚음을 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겼는데 울었다. 무서워서 눈물이 났을 것이다.

승리의 쾌감은 커녕 내 주먹에 묻은 녀석의 끈적끈적한 코피가 불쾌했다. 세수를 하고 방에 누웠다. 불안감이 몰려 왔다.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주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눈을 떴다. 녀석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따지는 소리였다. 애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당신네 깡패 아들 얼굴 좀 보자며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려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

녀석의 눈두덩이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고 아래까지 주먹만한 혹이 달려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내가 때린 주먹이 사람의 얼굴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 수술이라도 해야 한다면 치료비가 많이 나올 텐데… 아버지의 공사장 막노동 수입만으로 살아가는 우리집엔 돈이 없었다.

나의 승리로 싸움이 마무리 되던 그 순간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심각한 지경에 이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치료비 일체를 변상하겠다며 연신 허리 숙여 사과를 했다.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모님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다.


겁 먹고 울고 있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잘 했다. 사내놈은 싸움에서 지면 안 되지. 걱정마라 치료비는 물려주면 된다." 맞고만 들어오던 약골 아들에게서 처음으로 들려온 싸움 승전보에 아버지는 흡족해 했다.


아버지의 싸움과 생존에 대한 본능은 전쟁터에서 터득한 것이었다. 내가 군대 입대하기 전날 이었다. 아버지는 베트남 정글에서 극단의 생사 체험 얘기를 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아버지의 전쟁 체험담이었다.

여느 때처럼 수색 정찰을 나갔다. "탕"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소대장 철모 중앙을 뚫고 지나갔다. 아버지 눈 앞에서 벌어진 광경이었다. 소대장은 즉사했고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왔고 생사가 갈렸다. 총소리가 멎었고 소대는 고립되었다. 죽은 소대장을 옆에 두고 아버지는 정글에서 생애 가장 기나긴 밤을 새웠다. 일출을 다시 본 아침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소대장은 제대 귀국을 일 주일 남겨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수색 정찰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녀석은 나보다 한 학년이 높은 5학년이었다. 한 학년 높은 형을 이긴 녀석이라는 소문이 달동네에 퍼졌고 그 이후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급격히 친구가 많아졌던 것 같다. 그 이후 나는 누구와도 주먹 다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폭력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으니까.




폭력의 메커니즘


결국엔 내가 코끼리를 쏠 수밖에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니 그렇게 해야 했다. 나를 앞으로 떠미는 2천 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두 손으로 소총을 들고 서 있던 나는 백인 동양 지배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총을 든 백인인 내가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내가 연극의 주인공이었지만, 실제로는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라는 사실을. 그는 속은 비고 폼만 잡는 일종의 허수아비, 즉 사입(사입sahib은 과거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 사회적 신분이 있는 유럽 남자를 부르던 호칭)이라는 정형화된 인물이 되고 만다. 백인 통치의 전제조건이 늘 이른바 '원주민'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게 변한다.
그날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 조지 오웰 에세이 <코끼리를 쏘다> '코끼리를 쏘다' 중에서


조지 오웰이 20년 후에나 깨달았다던 사실을 나도 30년 후에 깨닫는다. 폭력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향한다. 자신이 약자라는 의식에 많이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더 약한 상대에 대한 폭력은 죄책감이 없다.

나는 약자니까 지금 나의 작은 폭력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일 뿐이라고 합리화한다. 약자는 이렇게 자기합리화된 자잘한 폭력에 익숙하게 된다. 세상의 갑질과 폭력의 메커니즘은 이렇게 작동한다. 그날 나는 비겁하게 싸우지는 않았지만 나는 약자라는 의식이 만들어낸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약자의 생존 본능은 가끔 극단적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죽이지 않으면 돌아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 한번 가한 폭력을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이게 한다. 약자의 폭력이 더 약한 자에 가해지는 폭력이 잔인성을 띠게 되는 이유다. 언제든지 폭력을 가동할 수 있는 강자는 애써 자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시도때도 없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잔혹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약자 의식과 콤플렉스가 내재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개인은 약자이면서 강자이다. 강자와 약자는 상대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폭력에 노출된 가정에서 자란 아들이 폭력 남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억지 같은 주장은 슬프지만 역설의 설득력을 가진다. 영원한 강자가 없듯이 영원한 약자 또한 없다.


오줌싸개 글쟁이 조지 오웰도 약자 의식에서 비겁하게 상대를 공격한 자신을 후회했다. 제국주의를 혐오하던 자신이 제국주의의 치안 유지 경찰을 직업으로 삼은 시절을 고백했다. 폭력은 강자와 약자 사이의 상황이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광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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