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흔적
몇 개의 흉터가 당신의 몸에 남아 있다.
아홉 살 때 동네 꼬마들과 그네에서 멀리 뛰어내리기 시합을 하다 생긴 무릎의 흉터. 삐걱거리는 의자에 올라가 쪽창을 닫다가 의자의 나사가 빠지는 바람에 떨어져 생긴 정강이와 손등의 흉터. 중학생일 때 무작정 친구들을 초대해서는 끓는 기름에 만두를 넣다가 집게손가락까지 담그는 바람에 생긴 화상 자국.
그녀에서도 흉터가 있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한강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회복하는 인간' 중에서
나는 영원히 과거와 화해할 수 없을까? 아니, 반드시 화해해야만 한다.
그렇다. 어릴적 흉터가 늙어서 다시 드러나고 그 흉터를 통해서 잊혔던 그 시절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내게도 몇 개의 흉터가 있다.
아홉 살 때 동네 형들 따라서 깨진 유리병들이 폐기된 유리밭에서 병깨기 놀이를 하다가 다친 무릎의 흉터, 비슷한 시기에 비사치기 놀이하다가 날아온 돌에 맞아 생긴 이마 한 가운데 흉터, 누나랑 다투다가 하필 누나가 휘두른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던 과학실험용 유리판 조각에 입술 끝이 찢어져 꿰멘 흉터...
입술을 꿰메고 집에온 내게 미안해 하는 누나에게 말했다.
“심하지 않대. 금방 낫는대. 의사선생님이 시간 지나면 거의 표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의사선생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매일 거울을 보았다. 입술이 비뚤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자 왼쪽 입꼬리가 일 밀리미터씩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이 뒤틀리고 피가 나고 입술이 부불어 오르는 악몽을 꾸었다.
얼굴 구석구석과 팔다리에 난 꿰멘 바늘 자국과 상처들이 가실 날이 없었다. 나를 처음 보는 어른들은 엄마에게 아들이 참 개구장이인가 봐요 했고 엄마는 속상해 했다. 난 결코 부주의 하지도 겁이 없는 아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겁이 많고 소심하고 신중한 아이 쪽에 속했기 때문에 엄마는 그런 오해를 듣기 싫어했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어린 나는 상처가 빨리 낫게 해주길 흉터가 완전하게 사라져 주기를 매일 기도했다. 하지만 살이 아물기 무섭게 또 다쳤다. 지금도 그 상처들은 흉터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들은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알 수 있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통증은 개별적이고 상처는 자기만 안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아들은 날 닮아 겁이 많다. 어느 날 아들의 눈에 다래끼가 났다. 아내가 아들을 안과에 데리고 갔다. 아내는 다래끼 짜기에 실패하고 돌아왔다. 무서워서 치료하는 침대에 눕지 않으려는 통에 진땀을 뺐다고 했다. 의사선생님도 방법이 없어서 일단 돌려보낸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당신 닮아 겁많은 녀석이니 당신이 데리고가라고 내게 떠밀었다.
다음날 아빠와 같이 병원에 가자고 약속을 했다. 급히 퇴근해서 아들을 데리고 안과로 갔다. 의사선생님은 아들을 알아 봤다. 오늘은 씩씩하게 치료 받으려고 다시 왔노라고 내가 대신 말했다. 그리고 아들은 침대에 스스로 누웠다. 의사선생님은 어제와 다른 아들의 태도에 놀라워했다. 나는 혼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집에와서 아내에게 의기양양하게 비결을 말해 주었다. 그날은 아예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신발조차 신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극약 처방을 써야 했다. 아들 앞에서 내 옷을 걷어올렸다. 배 한 가운데를 수직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십오센티미터의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칼로 이 만큼 자르고 수술을 했어. 많이 아팠겠지?”
“오늘 네가 하는 치료는 쪼꼬만한 바늘로 콕 찔러서 안에 있는 병균을 살짝 빼내는 거야. 별 것 아니겠지? 하나도 안 아플걸. 할 수 있겠지?”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을 신었다. 좋은 방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위수술 흉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구나하고 혼자 웃었다.
내 나이 마흔, 복부 한가운데를 세로로 길게 가르는 위암 수술의 흔적. 생의 절반을 정확히 가르는 흉터. 그래서 나는 이전과는 또 다르게 40년을 더 살아내야 한다. 흉터는 내게 말한다. 잊지 말라고. 이러고도 네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아픔으로 네게 경고할 거라고. 흉터는 잊을만 하면 불쑥불쑥 내 오만함에 대해 엄중히 훈계한다.
샤워를 할 때마다 거울에 비친 배에 난 수술 자국을 유심히 쳐다본다. 흉터는 내게 말한다. 너 또다시 아프고 싶니 하고. 아니, 절대로 두번 다시는. 머리를 한번 흔들어 털고 나오면 나는 매번 새 사람이 된다. 나는 내 몸에 난 크고 작은 흉터의 사연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흉터들은 제 각각 추억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추억은 통증도 아름답게 윤색시킨다.
격랑에 흔들리고 흔들리던 범선이 가까스로 연안에 닿으면, 땀에 젖은 강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일이, 강의 옆구리에 난 다갈색 점과 어깨의 희미한 흉터를 손끝으로 가만가만 짚어보는 일이, 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는 일이 나는 좋았다. 강의 몸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났다. 연애 초반부터 줄곧,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이야기를 강에게 털어놓는 것은 대체로 열기가 채 식지 않고 어질러진 침대 위에서였다.
-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 중에서
나는 타인의 흉터를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누구든 상처가 있다.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굳고 딱지가 내려앉고,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 새살이 바로 상처를 반추하게 되는 흉터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흉터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어쩌다 그랬을까 상상하기도 하고, 아물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혼자 추측해 보기도 했다. 때로 커다란 흉터나, 흉하게 일그러진 흉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나만 흉터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상처를 가진 것들은 상처를 겪은 것들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에게 배인 특유의 냄새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인 상처가 곪고, 물러터진 후에 딱지로 내려앉아, 거친 흉터로 남기까지의 세월이 만든 냄새였던 탓이었다. 그것을 알아내는 감각은 직관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경험으로 훈련되어 발달된 감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준이 허물없이 내게 다가왔던 것처럼, 나 역시 병준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갔을 것이다. 병준과 나는 서로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김이설 <선화> 중에서
대학동기 Y는 내게 술을 사 줄 수 있느냐고 했다. 우린 사적인 대화는 커녕 수업시간을 빼고는 얼굴도 몇번 못본 사이였다. 맥주잔을 채워 주자 Y는 한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자기 가족 얘기를 했다. 장애를 가진 언니, 폭력을 쓰는 오빠, 몸을 다쳐 누워만 있는 아버지, 가족 생계를 힘들게 붙잡고 있는 엄마... 봄날의 캠퍼스는 새내기 여대생 Y에게 잔인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나는 그랬구나, 라는 말 밖에 해 줄 말이 없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너한테 왜 하는지 모르겠다." 고 헤어지는 버스정류장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Y는 말했다. "내게 얘기 해줘서 고마워."라고 대답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 나는 그게 정말 궁금했다. 자기 상처의 대화 상대를 나로 골랐을까? 내게도 '상처가 곪아 터진 냄새' 같은 것이 나나?
늦깎이 대학생 J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형이었다. 키가 크고 배우같이 잘 생긴 외모와 멋진 목소리를 가져서 인기가 많았다. 남자인 내가 봐도 부러울 만큼. 나는 복학생이었고 집이 학교에서 멀지 않았지만 J의 자취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J의 집은 나의 본적지와 같았다. 영덕 사람. 형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그곳을 내 고향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억세고 거친 바다 사람들이 삶을 질곡지게 살아가는 동네. 내 마음에서 자리잡지 못한 고향 같지 않은 아버지만의 고향이었다. 우리들 끼리만 통하는 사투리와 억양만으로 동질감은 충분했다. 나이들면 고향에서 복숭아 과수원이나 같이 하자고 나는 마음에 없는 실없는 소릴했고 J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느 날은, "놀러 나갔다가 집에 오니 작은 누나가 죽었드라.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게 끝이었다."고 말했다. 또 어느 날은, "형이 북파공작원이었데. 나는 군대는 절대 안 갈라고. 그런 생각으로 일해서 그런지 야간 잔업 시간, 공장 기계에 손가락이 이렇게..." 라고 말했다. 고의였는지 사고였는지 나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의 불행은 현상만으로 충분했으니까. J는 자신의 통증과 슬픈 가족사 얘기를 무심하게 흘리 듯 뜬금없이 했다. J의 오른손 검지 끝마디가 없다는 걸 한 참 후에야 알았다.
J는 글을 쓰고 싶어서 국문과에 왔다는데 글을 쓰지는 않았다. 역시나 아버지는 오래전에 다쳐 집에 드러누워 지낸다고 했다. 할머니 뵈러 고향 갔다가 J에게 연락했다. J의 집에 들르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말렸다. 잠깐 전해 줄 게 있다고 우겨 집앞까지 찾아 갔지만 집안으로 나를 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이유였다.
몇 년 전에 학교 앞 햄버거집에서 J를 만났다. 서울에서 아는 형과 함께 산다고 했다. J는 그 사이 많이 늙었다. 택배물류창고에서 새벽일 나가다가 힘들어서 지금은 쉬고 있다고 했다. 바람같은 방랑자의 삶을 살 거라는 걸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알아봤다.
"형, 나 위암 수술해서 위 다 짤라냈다."
"어, 너거 동기한테 얘기들었다."
"아버지는 잘 계시지?"
"돌아가신지 쫌 됐다."
특유의 시크한 말투는 여전했다. 우리는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말을 많이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물고기에게 혼자말을 던지 듯 그렇게 몇 마디씩 던지는 방식으로 대화했다. 우리의 대화 방식은 참 특이하면서도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없이도 많은 이야기로 공간을 채웠다.
살면서 내 상처를 누구에게 보여준 적이 별로 없다. '상처를 가진 것들은 상처를 겪은 것들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게 맞는가 보다. 나는 무슨 상처를 가졌을까. 어릴 적 내 몸의 자잘한 흉터들도 세월과 함께 지워져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내 상처가 상처일까 의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