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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Oct 10. 2021

당신의 불행을 상상하다

... 친절 구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잃어버린 단어가 있다. 그 중에 '예의'와 '인격'이 있다. 탁월하다거나 우월하다는 말은 호응을 받지만 '훌륭하다'는 말은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인격의 훌륭함은 재화를 늘리고 출세하는데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 탓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무례가 예의를 밀어내고 무시가 존중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다.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고 그 사이에서 잠시 우쭐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웃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고 존엄을 짓밟아 얻는 행복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가.
우리 모두가, 존엄해지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나의 표정부터 살펴야 한다.
- 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중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제법 먼 길을 달려 부산 해운대까지 10년 넘게 머리를 하러 다니는 단골 미용실이 있다. 장모님 때부터 단골이었으니 몇 십년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되었다. 미용실 원장의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머리카락 한올한올을 허투로 다루지 않겠다는 정성스런 손길이 맘에 들어서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전화로 예약하고 가면 멀리서 기름값 들여서 왔다며 언제나 엄청난 할인은 덤이다.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미소와 태도로 뚝심있게 일하고 있는 미용실 원장님의 정성어린 서비스를 받는다. 그녀의 직업정신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본받고 싶다. 동네 구멍가게 헤어샵으로 보이지만 원장의 마인드는 프로페셔널이다. 젊었을 때는 부산의 메인인 서면에서 일했고, 넓은 매장과 많은 직원을 거느리던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고 아내에게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프로페셔널 느낌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지금 이 미용실은 아는 사람만 알고 단골들만 예약 받아 머리를 해준다. 이제는 조용한 동네로 물러나 제야의 고수가 되어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아직도 현역에서 뛰고 있다. 나는 원장님이 미용 일을 그만 두면 어쩌나 늘 노심초사한다.


아들은 곱슬곱슬한 머리를 스트레이트로 펴고 나는 듬성듬성 힘없는 머리를 꼬불꼬불 파마로 말았다. 나도 영양과 호르몬이 왕성하여 숱많고 머리가 꼬불거리던 건강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덥수룩하고 꼬불거리는 머리를 미치도록 펴고 싶었다. 항암치료로 숱이 없고 영양이 부족해서 힘이 없어진 머리를 지금은 죽자고 만다. 파마는 나의 고정 헤어스타일이 되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는 나의 고리타분함도 칭찬받을 만하다. 아들은 스트레이트로 편 자기 헤어가 맘에 드는 눈치다. 기분 좋게 미용실을 나선다.




같은 동네 국수 체인점에서 어중간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여사장은 장사하기 싫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전에 있던 직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장은 눈도 맞추지 않고 도망치듯이 주방으로 쓱 들어가 버린다. 아내와 아들이 자동주문 키오스크에서 주문한다. 나는 밀가루 면요리를 먹지 않지만 우리 동네도 있는 이 국수체인점에 오면 나가사키 짬뽕은 내 고정 메뉴다. 아내와 아들은 로제 돈까스를 주문한다.


주문 들어간지 몇 분이 지나지 않은 빠른 시간에 세 가지 음식이 나온다. 여사장은 짬뽕을 식탁 끝에 던지듯 걸쳐 놓고 간다. 쟁반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깜짝 놀라서 손으로 받쳐 내 앞으로 당긴다. 철판에서 해산물 재료를 볶아 면과 육수를 넣은 국물맛이 좋아서 이 체인점에 오면 항상 나가사키 짬뽕을 먹는다. 처음은 젓가락질이 아니고 숟가락질이지.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안으로 후루룩 삼킨다. 체인점 음식은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윽, 순간 짜증이 왈칵 올라온다. 나가사키 특유의 칼칼한 불맛이 없다. 아마 재료를 불판에 볶지 않고 육수만 대충 부어 나온 것 같다. 아무거나 대충 잘 먹는 내가 느낄 정도면 이건 심해도 좀 심하다. 만들 줄 몰라도 특유의 맛을 내는 원리는 나도 알고 있다. 이전에는 맛과 태도와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다. 손님도 많았고 친절했고 맛도 변함이 없었다.


맛 없는 원인을 나는 알지만 짜증이 나서 아내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음식이 나온 마당에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참고 먹는데 아내는 끝내 사장을 부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간이 문제가 아닌데 간이 안 맞다고 했다. 아내와 다툴 일은 더욱 아니라서 그냥 가만히 있는다. 여사장은 간장을 종지에 담아와서 한손으로 대충 그릇에 훅 부으며 "짜게 드시나요 봐요?"한다. 그말에 여자의 얼굴에 국물을 확 끼얹을 뻔했다. 나는 여사장을 째려봤지만 내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방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허기진 배만 대충 채우고 젓가락을 놓는다. 컵에 남은 물을 절반 이상 남긴 음식 그릇에 확 붓는 걸로 소심하게 항의한다. 물을 부으니 처음 나올 때 양과 똑같아졌다. 맛이 없어서 손을 전혀 대지 않았어요,하고... 잘 먹었다는 인사도 안녕히 잘 가시라는 인사도 없이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이제 두번 다시 이집에 오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아내가 운전하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여사장의 입장을 상상한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코로나로 손님은 확 줄었을 것이고 가게세는 내야할 것이다. 체인점 본사에 납입할 돈은 몇달째 밀렸고 빚은 계속 늘어났을 것이다. 오늘 문 닫을지 내일 문 닫을지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거기에 남편은 나처럼 중증 환자이거나 혹은 무능력한 폭력술꾼일지도 모른다. 아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딸은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가게 문을 닫지도 못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버텨보고 있을 거라고. 죽지 못해 사는 거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저렇게 장사할 수는 없다고.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흔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라고. 그냥 상상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조금 누그러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장사하는 동안에는 최선을, 아니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장사를 접고 다른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나?" 혼잣말을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확 죽어 버릴 수도 없는 막다른 길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안다. 삶이란 그렇게 말처럼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그녀가 약간 가엾어진다. 며칠이 지난 뒤 아내가 말한다. 그날 저녁에 아내도 너무 화가 나서 방문자 리뷰를 쓰려고 들어갔더니 이미 비슷한 불만의 리뷰가 많아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여사장이 내게 친절해야 할 의무와 내가 그 불친절에 항의해야 하는 이유를 따져 생각한다. 나는 그녀의 친절을 돈으로 사고 그녀는 그 돈에 대한 댓가로 친절해야 한다. 법인 스님이 말한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는 시대. 나는 그날 얼마 되지 않는 돈의 위세를 무시당해서 화가 난 것이다. 그녀는 마음대로 벌리지 않는 돈 때문에 마직막 남은 삶의 의욕이 꺼져 가고 있었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갔더라면 음식맛이 형편 없다고 예전에 왔을 때는 맛있었는데 음식맛이 변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실수가 있었거나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도 나를 초대해줘서 너무 감사했다고 따뜻하게 인사하고 집을 나왔을 것이다.


그날 나는 미용실 원장의 '훌륭한' 인격에 값을 치렀고, 국수집 사장의 '무례'에 지불한 돈이 아까웠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날 나는 그녀의 무례에 대해 무시하는 발언을 하거나 우월을 앞세워 공격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혹독한 값을 치러야 했다. 항암 치료 이후 사라졌던 '덤핑 증후군'이 나타났다. 집에 와서 허겁지겁 김치와 밥을 화와 함께 삼켰다. 자기 직전 저혈당 증세가 왔고 의식이 혼미했다. 응급실 가기 직전 아내의 현명한 대처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도 몇일 동안 저혈당 증세를 뇌전증 증세로 오인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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