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위 Nov 05. 2021

소멸

... 죽음에 관한 두 가지 풍경




꽃상여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닐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죽어 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그와 나는 마지막 시선을 교환하면서 작별했고, 차가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나의 몫이기도 할 것이었다. 다 똑같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무서움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몫일 뿐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장모의 초상을 치르면서 나는 그 절대적인 개별성에 경악했다.
- 김훈 <바다의 기별> 중에서


'행복한 죽음'이란 종종 어이없을 만큼 쉽고 편안하다. 불행한 죽음은 그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이, 아니면 우리 의료진이 죽는 사람을 더욱 처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죽음은 본래 무척 평온하다. 누구에게나 신체 기능이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찾아온다. 그게 바로 '죽음'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잠들 듯이 조용히 죽어간다. 심전도 모니터 같은 기계를 장착하지 않았더라면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경우도 많다.
- 고칸 메구미 <천 개의 죽음이 내게 말해준 것들> 중에서


한 사람의 임종 순간을 지켜 보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한 최초의 경험.


유난히 무더웠던 1990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로 기억한다. 보충 수업을 하고 있었다. 열어놓은 교실 창문으로 끼쳐들어오는 무더위와 성적 경쟁으로 교실은 가마솥처럼 뜨거웠다. 할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담임에게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마을로 먼저 갔다.


영덕 오보리. 나는 고향 마을 이름에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는 '까마귀'로 '보'를 포구로 읽었다.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는 거친 질곡의 파도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은 매사에 싸우듯이 말을 했고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술에 취했고 자주 싸웠고 남자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시내버스까지 합하면 버스를 네 번 갈아탔다. 포항에서 영덕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입석까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도로는 바닷가로 물놀이 가는 차량으로 북적였다. 아스팔트는 이글거렸고 버스 안에서 터진 아기의 울음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좁고 다급하게 몰아갔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없었다. 다만 무더위와 아기의 울음소리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렸고 사람의 임종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아부지, 손지 왔소. 눈 좀 떠보시오. 장손 왔소."

입씸으로 집안의 대장인 고모가 안방에 잠자듯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깨웠다. 나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장손 소리가 늘 거슬렸다. 앞으로 뭔가를 무겁게 지고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장'이라는 글자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반듯하게 누워 천정을 잠깐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어, 왔나.'의 대답으로 읽었다. 일그러지고 찌부러진 할아버지의 얼굴이 이물스러워 무서웠다. 할아버지의 의학적 사인을 지금 생각해보면 암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가쁘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증명했다.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말 거는 법을 몰랐다. 마직막까지 할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애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거친 뱃사람이었다. 오징어는 밤에 잡는다. 할아버지는 밤에 일하러 나가서 일출과 함께 집에 왔다. 바다가 붉은 아침 태양을 뱉어내면 배들은 포구로 들어왔다. 후광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포구로 들어오는 할아버지의 배는 멋있었다. 장엄한 생의 활력이 넘치는 아침 풍경. 할아버지가 내게 선명하게 남겨놓은 기억의 선물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고향마을 앞바다를 좋아했다. 막내 삼촌과 모래로 커다란 자동차를 만들어 탔고 사촌 동생들과 축구도 했다. 정박 중인 할아버지 배에 타서 뱃머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파도가 배를 들었나 놨다 하며 부드럽게 울렁거릴 때 우리들은 이유 없이 깔깔깔 웃음보가 터졌다. 큰삼촌과 친구들, 여자 친구들과 쪽배를 타고 해식 동굴에서 술 마시는 음흉한 놀이에 끼기도 했다. 고향 마을 앞바다는 지금도 꿈에 종종 나타난다. 마당에 부러놓은 엄청난 양의 오징어와 쥐치들이 펄떡이고 생의 활력이 넘치던 그때를 기억한다.


숨소리의 박자가 급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내 호흡은 오히려 차분하게 안정되었다. 할아버지의 숨소리는 잦아들더니 편안하게 연착륙하듯이 멈추었다. 어느 순간이 멈춤의 순간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릿했다. 살아 생전 불효를 많이 한 순서로 자식들은 오열했다. 조용하던 집안은 설움과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공유한 시간이 내겐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픔보다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충격이 더 컸다.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초상집은 슬프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치 축제 같았다. 사람들은 술을 마셨고 화투를 쳤고 밤새도록 떠들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은 애도와 눈물을 동반해야한고 생각했다. 장례가 축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통과 의례에 불과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할아버지 육신은 태워지지 않았다.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상여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았다. 태어나 한번도 마을을 떠난 적 없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묻어 있는 길을 되밟았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향해 꽃상여가 섰다. 바다가 토해낸 아침 태양을 등에 지고 선 꽃상여는 할아버지가 만선으로 포구로 들어오는 어선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상여의 무리들 맨 앞에 할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선산으로 올랐다. 이 시간의 주인공인 할아버지를 배웅하는 길잡이, 뒤를 따르는 마을 사람들... 내가 이 마을의 주인이 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당신의 고독한 여정의 몫을 마쳤다. 무덤 한가운데 장대를 꽂고 방향을 잡은 풍수는 봉분 쌓는 일꾼들을 지휘했다. 장대에 돈을 많이 달아야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간다고 풍수는 말했다. 사람들은 장대에 달린 흰천에 돈을 메달았다. 바람에 돈이 팔랑거렸다. 산자는 어떻게든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죽음 의식은 산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 죽음이란 무겁고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가벼워져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귀환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침 해가 잘 드는 곳에 묻혔다.


"아부지가 장손 보고 가실라고 기다리셨네"

입이 야무진 고모의 말이 내게는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나의 수호신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내 인생의 통과의례 관문마다 할아버지가 든든하게 지켜준다고 믿었다. 나도 언젠가 죽으면 누군가의 수호신이 될 것이다.




고독사



고독사는 외로운 최후라는 인상이 든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남겨진 우리 입장에서 해석한 생각이며 정작 본인은 그렇게까지 비통한 죽음이라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는 본인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나 추억이 가득한 곳에서라면 홀로 죽는 것도 전혀 고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행한 일도 아니다. 그곳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안정감을 주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장소는 자신이 선택했을 것이고, 원래 어디서 죽든 간에 죽을 때는 오직 혼자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다.'...
하지만 이 말은 부모가 죽는 순간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은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가장 큰 불효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 자식을 잃은 슬픔을 떠안게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동양권의 국가들 중에서는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커다란 죄악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부모가 죽는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죽을 때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당사자가 '최선의 타이밍'을 고르기 때문이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더라도 그날을 계속해서 붙잡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시간 동안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하면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이 최대의 애도하고 생각한다.

2030년에는 연간 사망자 수가 160만 명을 넘는 '다사多死 사회'가 도래한다고 한다. 그때는 죽음이 두렵고 슬픈 시대가 아닌 '죽음과 편안하게 공존하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
-고칸 메구미 <천 개의 죽음이 내게 말해준 것들> 중에서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꽃상여를 탄 시간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2021년 7월 1일. 향년 97세. 할머니는 고향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 요양병원에 들어간지 한달만에, 나는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 할머니는 죽을 시간과 장소를 그곳으로 택했다. 할머니는 원 없이 오래 살았다고 후회가 없었을까. 떠나기 전 누가 가장 보고 싶었을까. 떠나기 직전까지 또렷하게 정신을 유지하셨던 죽을 복 하나만큼은 타고났던 당신. 당신의 죽을 복은 자식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하나는 분명히 안다. 타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몰랐던 불쌍한 여인. 애증의 시간도 켜켜이 쌓이면 추억이 되는 걸까. 어쩌면 엄마(맏며느리)와 할머니는 공유한 시간이 당신의 자식들보다 더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향마을을 오가며 할머니를 살폈다. 다행인 것은 할머니가 떠나기 1년 전부터 엄마에게 좋은 말만 하더라고 했다. 미안하다고, 죄가 많다고… 평생을 엄마에게 쏟아내던 가시 돋친 말들을 멈추었다고 했다. 눈물 많은 엄마도 초상 내내 울지 않았다. 엄마는 영정 앞에 앉아서 향불이 꺼지지 않게 계속 불을 보살폈다. 이제 그만 잘 가시라고. 나를 놓아 달라고. 묵언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엄마의 투사물이었다.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집안 마당을 끌려다녔다던 엄마의 증언. 이유는 모른다. 한 여자가 같은 여자를 평생을 두고 그토록 미워할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손자손녀들이 있든 없든 할머니는 엄마에게 욕을 했다. 아버지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엄마는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남편을 원망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와 아버지는 매번 싸웠다.


잊었던 기억들이 있다. 엄마의 경험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가면 부엌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우리 장손왔냐며 머리며 얼굴이며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었다. 밥먹고 있는 나를 빤히 보다가 내 젓가락이 가는 반찬 그릇을 내앞으로 당겨놓았다. 우리 장손 많이 먹으라며. 뺑뺑이 돌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반찬 그릇들을 보면서 상처의 되물림을 생각했다. 할머니의 이중적인 얼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전에 할머니에게 언젠가 물어봐야지 했다가 묻지 못한 말이 있다. 할머니의 엄마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포항 우현화장장. 하나의 우주가 소멸되는 곳. 육신이 한 줌의 가루로 화하는 자리. 그리하여 다시 우주의 원소로 되돌아가는 시간. 우주의 원소로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분해되고 소멸된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났을까. 30년만의 재회라 서로 서먹했으려나. 할아버지는 땅에 묻혔고 할머니는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죽음이 왈칵 달려드는 곳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화장장이다. 이 도시에 죽음이 쉬는 날이 있을까. 하루에 몇 개의 우주가 이 곳을 거쳐서 저 아득한 세계로 떠날까. 그날도 여러 개의 우주들이 소멸의 소각로 앞에 줄을 섰다. 나는 할머니 유골이 추스러지는 불투명한 유리창 옆에 섰다. 건물 기둥에 등을 기대고 돌아섰다.


"할매, 잘 가이소."

짧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난을 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