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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2. 2021

재난을 묻다

... 재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멀수록 안도하다



유령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굼뜨고 늘어졌다. 생기와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클로즈업해 바라보면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엿볼수 있었다. 흰색 속에 꼭꼭 숨기고 있지만 유령들의 뼛속 깊숙이까지 불안과 공포, 분노가 들어차 있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구덩이가 다 패면, 유령들은 살처분할 돼지들을 어떻게든 돈사에서 구덩이까지 몰고 와야 했다. 혼비백산하는 돼지가 있으면 질질 끌고서라도. 구덩이로 던져질 때 돼지들의 발톱이 전부 빠져 있을 만큼 아비규환이었다.
"아마 다들 미치기 직전일거야."
- <기억하는 소설>, 김숨 '구덩이' 중에서


"우리 학교 확진자 발생.ㅠㅠ~  1학년이라, 우린 검사 안하고, 선별진료소 차려서 검사 진행. 1,2학년만. 그리고 확진자 학생은 4일 전부터 학교 안 오고 있다고는 하는데 상황을 지켜봐야겠지."


아내에게서 카톡문자가 왔다. '다행이다'고 답글을 달려다 말았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 코로나 상황이 나아진 건 없고 국내 확진자 수는 5천 명을 넘었다. 누적사망자를 찾아 본다. 3,658명. 코로나로 2년만에 국내에서 3천6백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단일 사고로 이 정도의 사망자가 생긴다면 나라 안이 뒤집어지고 해외 토픽에 매일 오르내릴 것이다. '오미크론'이라 명명하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는 외신이 뜬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국내에도 오미크론 확진자가 생겼다.


내친 김에 잘 안 보던 세계현황을 본다. 확진환자 261,497,854명. 사망자 5,199,627명이다. 일십백천만... 뒤에서부터 단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샌다. 누적 확진환자가 2억 명, 지금까지 5백만 명이 죽었다. 지금 지구촌에는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하루에 5천명 꼴로 죽어가고 있다. 코로나 첫 발생 이후 사실상 매일 최악의 상황을 갱신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감각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우성친다. 장사가 되지 않아 죽을 지경이라고, 돈 못벌어 죽으나 코로나 걸려 죽으나 매 한가지 아니냐고, 그래도 코로나는 걸리면 죽을 확률보다 살아날 확률이 높지 않느냐고. 그러니 나는 밥벌이와 생활과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산 자는 자신의 삶을 최대한 가치롭게 살아내는 게 인간의 윤리가 아닌가. 사망자의 80%는 노인과 기저질환자이고 젊고 건강한 자는 걸려도 감기 앓듯이 다시 원상 복구되는 건가보다고 짐작할 뿐이다. 모든 게 짐작과 느낌없는 숫자로만 인식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코로나 확진받은 학생이 얼마나 아플지 어디에서 어떻게 치료 받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고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걸린 사람과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코로나가 무서운 건 관계의 거리가 멀수록 안도하는 아이러니에 익숙해진다는 것.


상식을 넘어서는 죽음을 매일 목격하고 나면 죽음은 일상이면서 비현실이다. 그리고 죽음의 현장은 숨겨진다. 코로나 환자는 격리되고 끝내 코로나로 죽음을 맞이한 자의 뒷이야기는 함께 묻힌다. 구제역이 번지면 살아있는 돼지들을 모조리 땅에 끄러다 묻듯이 산 자는 살기 위해 죽음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모든 이야기도 함께 끄러다 묻는다. 죽은 자는 침묵하고 산 자는 외면한다. 코로나로 인한 죽음은 통계표 숫자 '1'로 표시될 뿐이다. 슬픔 없는 우리들의 슬픔이다.




최대한 가까운 데서...


나는 엄마에게 정말 다 죽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모르겠다고, 남들 죽을 때 같이 안 죽고 지옥 같은 세상에 혼자 살아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우주는 인간이나 생명 같은 거에 관심도 없다고. 인간이 우주에서 사라진다고 달라질 것도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고... 근데 이해를 하면 또 이해가 안 되는 게 생긴다. 우선 우주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가 아니야. 나도 미세 먼지가 아니다...

... 왜 해야 해, 기도를? 그건 나한테는 세상에 대한 인사 같은 거지. 잘 잤다는 인사. 잘 자라는 인사.
글쎄. 이제 와서는 사는 건 모르겠고... 그래도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 죽으면 좋겠다. 네가 오든가 내가 가든가 최대한 가까운 데서.

지구가 사라지면 엄마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이 우주의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는지... 내가 엄마 가까운 곳으로 얼마 가지 못하더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이미 충분히 가까이 있다고, 우주는 무한하나 시작과 끝이 있기에 언젠가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해도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라고 꼭 말해 줄 것이다.
- <기억하는 소설>, 최진영 '어느 날(feat.'돌멩이')' 중에서


우리에게 미래란 고작 100년이란 시간을 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래는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100년을 빼고는 무의미하다. 한낱 흥밋거리의 공상적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의식이 소멸된 이후 시간은 함께 소멸된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다분히 유물론적 사고이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설사 사후 세계를 믿는다고 하더라고 그 세계의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흐를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 세계에서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가 파괴되는 날이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오만한 상상이다. 지구는 인류세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오래 존재할 것이다. 45억년 전에 지구는 생겨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원소들의 세상, 미생물의 세상, 식물들의 세상, 공룡들의 세상....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인간의 세상이 잠시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공룡이 지구에서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졌던 것처럼 인간도 지구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엔가 가뭇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이후 지구에는 어떤 생명체가 주인이 될지, 생명체 자체가 사라진 뭇별로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세는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고, 그래도 지구는 인간세보다는 길게 존재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인간세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공룡들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던 공룡들 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다.


다만 과학자들이 말하는 행성과의 충돌이나 외계생명체가 지구를 하루 아침에 박살내는 상상은 어디까지나 확률이 희박하다. 그 희박한 확률의 일이 인간세 중에 일어날 경우 인간세와 지구세의 종말은 함께할 것이다. 운석이 충돌해서 지구가 박살나서 모두 죽는다면 죽음은 하나도 억울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우주적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날한시에 공평하게 하나의 우주 원소로 돌아가는 현상일 테니까. 그 순간이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일상을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최대한 가까이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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