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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11. 2021

돈들이 머무는 방

… 돈 세탁 전문가 두 여자 이야기




S#1.  돈 세탁  - 2021.12.8.수


일찍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가 언명한 대로 현대인은 '자의식의 화신'이다. 자의식이란 일종의 '의식의 비만'에 해당한다. 육체적 비만도 문제지만, 이 정신의 비만도 존재를 한없이 탁하고 무겁게 만든다. 그런데 몸을 많이 쓰게 되면 이 '이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체력단련과 정신의 평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각종 신경성 질병에서 벗어날 뿐더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짱'이 늘게 된다. 한의학적으로 배짱은 하체에서 생긴다. 간과 신장의 기운이 충만해야 가능하다... 열이 위로 뜨는 현상을 '허화망동'이라 한다. 허화망동하면 번뇌망상이 많아지면서 극도로 소심해진다. 소심하다는 건 타자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자와 소통하는 능력, 그것이 곧 배짱이다. 따라서 배짱을 키우려면 하체를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몸고생'이야말로 여러모로 행운인 셈이다... 20대에 이미 철밥통을 차고 앉아 평생 똑같은 직장에 비슷한 일만 해야 한다면 그게 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까.

열여덟 살 해완이의 표현을 빌리면, "44만 원 세대는 한 달에 44만 원밖에 벌지 못하는 불행한 세대가 아니다. 한 달에 44만 원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유쾌한 세대"다.

처음엔 다들 스위트홈, 보금자리에 대한 꿈으로 시작한다... 근데, 일단 내집 마련의 레이스에 들어서는 찰나, 저 깊은 곳에서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공동체는 축적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만약 조직이 번창하는데 구성원들은 피로와 무력감에 시달린다면? 그건 실패다.

무형의 세계에선 수치와 양이 아니라 리듬과 강밀도가 가치를 결정한다... 먼저, 가장 큰 증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 없음을 의미한다.
- 고미숙 <돈의 달인, 호모코뮤니타스> 중에서
돈세탁 전문가

빨래 널다가
마누라 옷에서 나온 돈 또 적발
한두 번이 아니다
일명 '돈세탁 전문가'
진짜 돈 되는
돈세탁 전문가가 되든가
으~이~그~
내가 못살아

적게 벌고 적게 쓰고 적게 소유하기.
그리고 더 크게 행복하기
이게 가능할까?
여기까지 이르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경지가 있다니
증여, 소유와 무소유 사이의 경계를 없앤다.
- 2014.10.8. 카카오스토리


육아와 교육, 생활의 지혜, 관계, 가족 등 모든 부분을 믿지만, 아내를 아직까지도 믿지 못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돈이다. 돈을 나쁘게 쓰거나 투자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내와 나 모두 돈에 문외한이며 욕심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돈을 모른다. 아내는 돈은 써야 들어오고 자잘한 돈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는 조각 돈에 민감하다는 게 다르다. 나는 스스로를 속물스럽지는 않지만 좀스럽다고 느낀다. 우리 엄마들처럼 차곡차곡 저축해서 부자되자는 시대는 끝났다. 뭐가 맞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의 가장 취약 분야가 돈이다.


부부는 거의 모든 부분에 거리낌 없이 말하지만 돈은 금기어로 존재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돈 얘기가 나오면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못 번다거나 돈을 함부로 써서가 아니라, 돈에 대한 기본 생각이 많이 다르다. 결혼 초에 돈 개념에 대한 차이를 알고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겨 버렸다. 골치아픈 게 싫어서. 좀스러운 것보다는 얼렁뚱땅이 낫다고.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집의 경제력은 그닥이다. 앞으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혹여 큰 돈이 생기더라도 돈을 지혜롭게 굴릴 그릇도 못되고 방법도 알지 못한다. 부부가 이렇다보니 딸과 아들의 경제 관념도 별로라는 점이 걱정된다. 그나마 아들은 있는 돈 관리는 좀 하는데 딸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늘도 빨래를 개다가 딸 체육복 주머니 속에서 세탁된 만원을 발견했다. 한숨을 넘어 화가 난다. 이유는 낮에 가족 단톡방에서 엄마한테 만원만 있으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돈을 달라는 딸.


딸의 책상과 화장대 위에는 언제나 지폐와 동전이 굴러다닌다. 천원짜리와 동전은 딸 눈에는 돈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만원을 깨서 쓰고 천원짜리들은 여기저기 흩어버린다. 딸이 돈 쓰는 방식이다. 방안에 굴러다니는 저 불쌍한 낮은 계급의 돈들이 기거할 방을 만들어 줘야 할텐데…


나는 큰돈이 행운처럼 굴러들어오는 것도 무섭다. 사람의 품성과 생활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키는 것 역시 돈이다. 딸은 평일 동네 삼겹살 가게에서, 주말엔 집에서 조금 먼 체인점 커피숍에서 생애 첫 알바를 시작했다. 부부는 말리지 않았다. '허화망동'하는 걸 '몸고생'을 통해 해소라도 시키려니 하는 마음으로… 그렇지 않아도 딸은 '배짱'이 좋다. 고미숙의 문장이 '허화망동'하려는 내 마음을 단단하게 다잡아 준다. 나는 자식들이 돈 잘버는 사람이기보다 돈의 속성을 잘 알고 어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S#2. 있는 돈 한땀한땀 - 2021.12.9.목



때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것은 신의 계시다. 멋진 아빠 노릇하라는... 어제 똑딱이 단추 하나를 빠뜨리고 온 강사님 덕분에 더 좋은 타이밍을 잡았다. 아침에 단추를 달아 배달온 지갑을 보자 어제 만원을 세탁한 딸이 떠올랐다. 내 지갑 속에서 거의 1년 넘게 잠자고 있던 빳빳한 현금 3만원을 꺼내어 새 지갑에 넣는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어제 전학공(전문적학습공동체) 체험프로그램에서 가죽공예 반지갑을 만들었다. 내 손으로 한땀한땀 바느질을 했다. 두 가지 서글픔이 몰려왔다. 하나는 항암치료로 눈물샘이 막혀 시도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나빠진 시력으로 바늘에 실을 꿸 수 없다는 것. 바늘에 실을 못 꿰는 건 노안, 늙을 로. 나에게는 늙음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또 하나는 지난 주말 아들과 축구하다가 아들이 쏜 강슛을 막으려고 펀칭하다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통증이 생겼다는 것.


나름 바느질에 자신있는 손재주라 자부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젊은 남자 부장님 옆에 앉아서 바늘에 실꿰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 실을 꿰어 주고도 자기는 더 빨리 끝냈다. 이런 젠장, 이런 것에 질투가 났다. 나도 부장 나이 때는 손이 날아다녔다. 마무리는 옆자리 기획 여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았다.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바느질하면서 느꼈다. 상황이 너무 웃겼다.


처음에는 내가 가지려고 초록색 가죽을 선택했다. 초록색 내 노트북 가방과 세트가 될 것 같아서다. 바느질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실을 빨간색으로 선택해놓고 보니, 아내의 빨간 노트북 가방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내를 줄까하는 쪽으로 생각이 조금 넘어왔다. 바느질 하면서 행복하고 자잘한 고민을 했다.


퇴근하자 저녁 알바 나가기 전에 딸이 들어온다.

"딸, 아빠가 네게 줄 선물이 있어."

"..."

"이거 아빠가 어제 손수 한땀한땀 바느질해서 만든 수제가죽지갑이야. 열어 봐."

"어 돈도 들었네."

"원래 지갑 선물할 때 현금도 같이 넣어 주는 거야."

"우와, 삼만원 씩이나."

"이건 상징적인 선물이야. 너의 쪼개진 작은 돈들을 여기다 넣었으면 좋겠어."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돈쓰는 공통점은 천원짜리 모아서 만원을 만들고, 만원짜리 모아서 십만원 만들고, 십만원짜리 모아 백만원 짜리 적금을 붓고 그렇게 부은 적금으로 너 캐나다 갈 때 비행기 표값 만들어 주신 거야."

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없이 진지하게 듣고 있다. 어제 돈 세탁해서 엄마한테 이미 한 소리 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자기 지갑에 얼마의 돈이 들어 있는지 항상 알고 있는 거, 카드를 쓰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수입의 한계가 얼마인지 인식하고 있는 거."

"돈 번다고 시간 버리고, 돈 쓴다고 또 시간을 소비하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를 소모하는 악순환의 순간이 오고야 말지."

"아빠가 늘 말하는 번만큼 쓴다는 건, 있는 돈 잘 관리하는 게 핵심이야. 그것을 시간으로 환원시켜 행복을 얻는 전략"

"주식 투자도, 부동산 투자도 하지 않아 아직 전세 살고 있지만 난 우리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네가 앞으로 큰 돈을 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큰돈을 벌었더라도 그건 행운 오십 프로, 삼십 프로는 누군가의 도움이고, 순수한 너의 능력은 이십 프로라는 사실을 잊지마. 그러니 너의 능력을 제외한 팔십은 사회로 환원시켜야 옳은 거라는 마음으로 돈을 벌고 썼으면 좋겠어."

아뿔싸, 고작 반지갑 선물하면서 썰이 너무 길었다.  


"고마워, 지갑 잘 쓸게. 나 알바하러 가요."


딸은 발걸음이 가볍게 나가고, 때마침 아내가 퇴근해서 들어온다


"여보 당신한테 준다고 했던 지갑 딸한테 줬어.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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