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사 가는 길
아내에게 콧바람 쐐 주려고 수선사를 찾는다. 인터넷에 그냥 '예쁜 절'을 검색해 정보없이 무작정 찾아 간 절이다. 전통적 사찰이라고 보기 어려운 특이함에 이끌려 돌아오는 차안에서 갑자기 이 절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2019년 인터뷰 기사가 있다. 대구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니다가 이 절의 주인('주지'보다 '주인장' 호칭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여경스님은 29세에 순천 송광사로 출가했다. 1993년 이곳에 논을 사서 직접 절을 짓고 정원을 가꾸었다. 호미로 잔디를 심고 꽃을 심고 연못을 만들었다. 도를 닦듯이... 절의 나이는 30년이 조금 안 되었다.
아름다운 정원은 가람이라기보다 손재주 있는 주인장이 잘 가꾸어 놓은 전원주택 앞마당 같다. 향냄새와 불경소리보다 카페와 커피가 더 잘 어울리는 묘한 느낌을 주는 암자다. 카페가 이질감 없이 받아들어지는 건 30년 시간 스님이 혼자 만들어낸 시간의 공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고작 30년 하겠지만 개인에게 있어서 30년은 긴 세월이다.
세상은 시간의 힘과 싸우는 미련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흔하다. 다만 이들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시간과 싸우는 자는 숨어 있기 마련이다. 수선사도 'EBS 한국기행'에 소개되고 SNS에 '예쁜 절'로 소문을 타면서 방문객이 많아졌다. 주말에는 하루 방문객이 5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절이라기보다 관광지를 표방한 곳이 돼 버렸다. 그래도 천박한 관광지 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절 구석구석 방문객이 불편하기 않게 주차장, 화장실, 카페, 템플스테이 숙소, 정원 등에 스님의 정성과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님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어서 절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시대가 변했고 종교도 변해야 한다는 스님의 인터뷰 말처럼 손수 실천으로 보여준 용기와 인내에 박수를 보낸다. 무겁고 엄중한 종교의 시대는 저물었다. 기독교도 불교도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이곳 템플스테이에는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도 힐링하고 쉬어갈 수 있게 열려 있다고 한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기능은 자신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자신이 타인과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라 원효도, 당신이 어릴 적 동네 절에서 생활했던 법륜 스님도 그랬듯이 그들의 행적 자체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피곤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류의 인간에 여경 스님도 추가다.
아내와 주차 공간을 찾다가 한바퀴 돌아 내려와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가는 중이었다. 오래된 중형승용차 지붕에 루프탑을 얹은 스님이 운전하는 차를 목격한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말한다. 그분이 여경 스님이 맞다고. 아내는 아닐 거라고 했지만 나는 왠지 확신이 든다. 루프탑의 정체는 스님은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와 본의 아니게 시끄러워진 절을 수시로 떠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 루프탑은 스님의 차박 숙소일 것이다. 트렌드에 맞게 차박캠핑하는 스님도 잘 어울린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세상 속에서 견고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는 그를 그렇게 믿고 싶다. 원효도, 법정도, 법륜도, 여경도 절에 있지만 절에 있지 않았다. 문득 300년 뒤 이 절의 모습이 궁금하다.
자신에 대한 염려에 앞서 남을 염려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은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라는 것을 마음에 거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 법정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직접 기도하면 어때? 그렇게 하면 절하는 이 자체가 바로 남을 돕는거 아니냐? - 성철, 3천 배를 마친 한 대학생에게 한 말
- 법정,성철 <설전> 중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외할머니, 언니가 있다. 익숙한 얼굴들이 아프고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의 그것과 너무 다른 온도라서 아프다... 엄마는 너무 친절해. 친절한 세계를 알아버려서 내 몸은 두 동강 난 거다.. . 처음부터 따뜻한 세계를 몰랐다면 싸늘한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했을지도 모른다.
- 홍승희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중에서
수선사 뒷뜰 그늘에 앚아서 아내가 유튜브 'EBS 한국 기행-스님의 뜰, 산청 수선사 편'을 보여준다. 나는 귀찮아서 빠르게 돌려본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이 뭔지 아세요? 바로 '친절'입니다. 하하."
여경스님이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는다.
"맞다. 친절." 나는 혼잣말로 책에서 읽은 법정스님의 말을 떠올린다. 여경은 법정의 책을 읽었을까?
수선사에서 돌아오는 길. 누나와 외할머니 집에 간 아들의 전화가 계속 울려댄다. 자기는 지금 친구들과 축구하기 위해서 집엘 가야하는데 누나는 내일 가려고 한다고. 그럼 혼자 먼저 오라고 아내는 말한다. 다시 전화가 온다. 기차를 놓쳤다고. 오로지 자기 목적을 관철시킬 생각만으로 짜증을 부리고 있는 아들에게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아들은 전화도 끊지 않은 채 대안도 내 놓지 못하고 묵언 시위하고 있다.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엄마에게 심통을 부리는 아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아내를 나는 지켜보고만 있다. 저 전화를 빼앗아 아들놈에게 소리를 확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는다.
전화 통화는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이어진다. 할머니집에 다시 돌아가려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고. 어제 먹던 김치찌개를 다시 데운 부부의 저녁 밥상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오랜만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 저녁은 뭘 먹을까하고 수선사 출발할 때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당신은 말도 안되는 고집 부리는 녀석한테 뭘 그렇게까지 친절을 부려!"
"자기도 사정이 있겠지."
기차 예매를 하지 않은 사정, 택시가 잡히지 않는 사정, 축구하고 싶은 마음까지 아들을 대신해서 내게 설명하려 든다.
"됐어. 나한테 아들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하지마. 누가 그런 거 몰라서 가만히 있느냐고!"
소릴 버럭 지르고 방에 들어가 잠 들어 버린다.
새벽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아들과 딸은 오후가 넘도록 집에 오지 않는다. 비가 와서 축구는 틀렸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할머니 집에서 늦잠이나 실컷 자고 스마트폰이나 열심히 보고 오겠지.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결국 자신을 위한 위선의 기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늘 깨닫기만 한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다. 자식을 위해 훌륭한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는 없듯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내 자식이 잘 되게 해달라고 가장 순수한 의미의 기도를 한다. 그 대상이 자신과 현실적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들을 향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박애가 성립된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게 해달라고 좋은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조상에게 부처에게 하느님께 필요할 때마다 기도한다. 내 기도는 모두 나를 위한 기도였다. 속 썩이는 자식이고 제자이지만 아들과 제자가 잘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직접 기도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남자라는 족속들의 이기성은 염색체에 각인 되어서 이젠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합리적 의심까지 하게 된다. 아들도, 나도, 나의 아버지도 하나같이 똑같다. 하아… 나의 성장은 더디고 더디다. 책 속의 문장도 그들의 가르침도 내겐 한낱 나를 위한 허영일 뿐이구나. 아내에게 깨끗하게 패배한 비오는 아침, 오늘은 좀처럼 기분이 개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홍승희의 마음과 같은 편이다.
"당신은 너무 따뜻하고 친절해서 아들이 싸늘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할지도 몰라." 나 혼자만의 걱정이라서 조용히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