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을 걷다
양쪽 발톱이 다 빠졌다.
여러 날 걸었다. 거리에서 지리산을 오를 때 발톱은 이미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짜식,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새 발톱은 나올 것이다.
이현아, 그거 아니?
새로 나온 발톱이 예전 것보다 훨씬 두껍고 힘이 세다는 거?
그 길로 무작정 걸었다… 몸이 힘드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엄지발톱이 얼얼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점이 있어. 하나는 저 아래 바다와 바다 사이에 부는 바람의 길 때문이고, 두 번째는 혼자서는 도저히 바닷가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 모습이었어. 혼자 바람을 맞는 사람들은 웃지 않아. 반드시 함께 있는 사람들이 웃어. 같이 온 사람의 몸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거나 머리칼이 몹시 헝클어져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우스꽝스러운 모습 때문에 배를 잡고 웃는 거야. 나도 누군가 곁에 있다면 웃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바람은 또 어딘가로 내달릴 것이고 그 자리에는 난생처음 맛보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이 늘 처음인 것처럼.
- 김선영 <시간을 파는 상점> 중에서
"그래 문경 한번 온나. 사과꽃 다 지기 전에 한번, 꼭."
사촌은 어렸을 때 내가 시골에 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금요일이 세번 지났을 즈음 그는 이라크에 갈 계획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미 단체 사람들이 전쟁 전후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사게 될 중고차와, 그가 간다는 바그다드를 번갈아 떠올렸다. 노교수에세서 받을 돈으로 우리가 이루게 될 미래의 어느날들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은 공통점이 없게 느꺼졌고 결국 시간이 지나도 함께 묶일 수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뒤에도 우리가 모란 시장을 걷는 시간은 조금씩 길어졌고 나는 푸성귀며 고기며 생선과 화초가 뒤섞인 시장 어딘가에서 자주 웃었고 사랑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페퍼로니가 뭐였는데요? 함께 출연한 게스트가 묻자 그는 글쎄요, 하더니 잠시 말을 끌었다. 그러고는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라고 했다.
그때 나는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노량진에서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두번 고배를 마셨고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고택에서 받은 돈은 그렇게해서 중고차가 아니라 사촌에게로 흘러들어가야 했다. 그러는 동안 여러번 괘안타,라고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적은 사실상 없었다는 것.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 김금희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중에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육지의 끝.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 몇날며칠을 걸어본 적 있니?
비행기나 자동차 말고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서 말이야.
조금의 낭만과 지적 허영이 함유된 내가 살아본 적 없는 낯선 땅 '산티아고' 그런 데 말고.
내가 발붙이며 살고 있는 이 국토를 발이 부르트고 짓무를 때까지 걸어 봤니?
육지의 끝이 바다의 시작이라는 걸 발로 확인해 본 적 있니?
그것은 파괴 본능이었다. 나를 잘게 부수어서 폐허 위에 다시 세우고 싶었다. 그래야만 어떻게든 다시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 떠나야만 했다.
부끄럽지만 내 정신의 사춘기는 늦게 찾아왔다.
돈이 많으면 안 되었다. 힘들면 탈 것에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무전은 아니었다. 뭔가는 먹어야 걸을 수 있었기에. 구걸할 용기나 재주가 있었다면 돈을 한푼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이었다. 나는 잠수를 탔다. 걷고 걷다가 만난 육지의 끝, 어느 한적한 바다에서 영원히 잠수하고 말 거라며 집을 나섰다.
집을 나가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나갔다간 엄마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낼지도 몰랐다. 엄마에게는 그냥 여행 갔다오겠다고만 말했다. 엄마는 누구와 가며 어디로 가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냥 평소와는 다르게 그러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엄마는 그때 내 상태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군대까지 갔다온 녀석이 어떻게 될 리는 없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걸을 생각은 아니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 무작정 섰다. 방향을 잡지 못했다. 집을 떠나온 이유가 삶의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인데 막상 터미널에 서니 가야할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대합실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막연히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좀더 넓은 터미널로 가면 세상으로부터 내가 숨을 선택지가 많을 거라 기대했다. 대구터미널에 도착하자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보였다.
문경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문경새재 입구 마을 밤거리에 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혼자였다. 내리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11월에 관광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추워서 몸 녹일 곳을 찾아야 했다. 민박이라고 적힌 집을 여러 군데 들어갔다가 문전박대 당하거나 내가 가진 돈 전부를 하루 저녁에 털어넣어야 할만큼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렀다. 관광지였지만 비수기에 젊은 남자 혼자 찾아온 손님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찾아간 민박을 하지 않는 가정집. 허리굽은 할머니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돈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 있다고 했다. 돈은 받지 않을테니 쌀가마니 쌓아둔 고방에라도 자고 가려면 그러라고 했다. 방은 추웠고 쌀 냄새와 홍시 삭는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안방으로 건너와서 뭘 좀 먹으라고 했다. 할머니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초등학생 어린 손녀는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공책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건너간 안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고봉밥과 김치, 된장찌개가 전부였지만 단숨에 그릇을 비워내자 할머니는 사과를 쟁반에 담아 왔다.
"사과 좀 먹을라니껴? 벌레 먹고 몬 생겨도 먹을만 하니더." 할머니는 쟁반을 내앞에 무심히 내려놓고 보던 드라마를 계속 봤다.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멍투성이인 사과가 꼭 내 마음 같았다. 나는 사과를 깎아 같이 드시라고 권했지만 할머니는 "마이 무서 나는 안 묵니더." 했다. 손녀도 "아저씨 드이소." 했다. 나에 대해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뭘 물어보지 않는 할머니와 손녀의 적당한 무심함이 좋았다. 고방에는 두꺼운 겨울 이불이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이불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단잠을 잤다.
해가 뜨기 전에 문경새재에 올랐다. 안개와 서리로 사방이 뿌얘서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입김이 솔솔 나왔다. 옷을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걸 후회했다. 그래도 겨울 초입의 새벽 문경새재는 어제까지 뜨끈뜨끈했던 내 머릿속을 차갑고 상쾌하게 했다. 새벽부터 해뜨는 네 시간은 머리가 말끔이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풍경을 선물 받았다. 산속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고개를 완전히 넘어 오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탄력을 받은 걷기는 단순한 충동으로 바뀌었다. 이제부터 나의 무작정 걷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군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해서 세상에서 걷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래 걷는 것에 나름 요령이 있었고 자신이 있었다. 걷다가 걷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걷고 싶었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한번도 오래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천천히 걸으면 숨도 차지 않고 다리도 안 아플텐데. 지구 끝까지라도 걸을 수 있지 않나?
하룻밤만 새고 걸어봐 그럼 어떤 큰 깨달음이 찾아오고야 말것이라고. 나는 고행하는 수도승 흉내를 냈지만 찌질한 복학생일 뿐이었고, 고독한 여행가처럼 보였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길 잃은 어린 아이였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은 탓에 육지의 끝을 보려면 동해바다를 보아야 했다. 문경, 수안보, 충주, 제천, 원주, 치악산, 오대산, 강릉, 정동진까지. 국립공원 산을 두 개 넘었고, 작은 산들은 몇 개를 어디를 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골의 마을회관과 당나무 아래 평상에서도 잤고, 눈을 뜨면 걸었다. 낮이라서 움직이고 밤이라서 잘 수 없었다. 몸이 움직여지면 걸었고 잠이 오면 적당히 몸 누일 곳을 찾았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밤에 걸어야 했고 낮에 양지 바른 곳에서 쪽잠을 잤다.
걸으면서 나를 파괴하려는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답은 오리무중이었고 생각은 극단으로만 내달렸다. 누군가 미워할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다가 나도 죽어 버리면 그만일 텐데… 이 나이가 되도록 알껍질 속에 갇혀 살아온 내가 한심해서 나를 죽이고 싶었다. 몸을 학대하면 할수록 살고 싶은 본능이 더 강하게 용솟음쳤다. 그땐 이 역설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터졌다를 반복했다. 비와 땀에 젖은 바지가 사타구니를 벌겋게 쓰라리게 했다. 걷기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춘들 짓무른 살갓이 금방 살아나지도 않을 것이고 쉬었다가 다시 움직일 때의 통증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도움받을 사람도, 간단하게 해결할 돈도 없었다.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서 끝과 마주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하나 뿐인 결론이 마음에 들었다. 지독하게 외로웠고 누군가가 그리웠다. 대상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한 걸음을 옮기는 힘이었다.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필 태백산맥 줄기로 들어왔을까. 사람이 없는 곳에서 숨어 있고 싶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사람이 그리웠다. 보이는 건 산이고 마을은 듬성듬성 있었고 사람은 더 귀했다. 3일 밤낮을 걷고 나니 체력이 바닥났다. 그러고도 몇 일을 더 걸었는지 정확히 내가 어디어디를 걸었는지 그 당시에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발길이 닿은 육지의 끝은 육지의 정동쪽, 정동진이었다. 정동진도 관광지였지. 여기를 종착지로 삼았으니 집에 가는 길은 기차를 타겠다고 마음 먹고 역사로 들어가 차비를 계산했다. 딱 대구까지 돌아갈 돈이 남아 있었다. 정동진은 해맞이 명소니까 밤을 새고 해뜨는 거나 보다가 기차 타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역사를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일출을 보는 건 틀렸다.
무엇보다 씻고 싶었다. 남은 돈으로 민박집에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잠을 편히 자고 대구까지 계속 걸어내려갈까, 아니면 비를 맞고 밤을 새고 기차를 타고 내려갈까 고민했다. 민박집 몇 군데를 물어 봤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어차피 숙소보다 기차를 결정한 뒤라 미련은 없었다.
해변가를 어슬렁거렸다. 몇일 동안 씻지도 못하고 산만 오른 탓에 옷에 밴 땀과 빗물이 섞여 역겨운 냄새가 났다. 주말 데이트 나온 깔끔한 차림의 연인을 멀찍이 피해 다녔다. 사람들이 비와 어둠을 피해 숙소로 돌아가자 해수욕장 모래사장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잠이 쏟아졌다. 허리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굽히고 앉아 불편한 잠을 청했다. 해안 초소의 서치라이트가 내 머리 위로 왔다갔다 했다. 강렬한 불빛에 놀라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고개를 쳐들다가 후레쉬 불빛이 내 머리를 바닥으로 다시 쳐박게 했다. 후레쉬 불빛 뒤로 어깨에 맨 소총의 끝이 보였다. 초소 경비 군인이었다. 두 명이었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신분증이 없었다. 대학생이고 여행을 왔다고 했지만 그들은 나를 호락호락 놔주지 않았다. 결국 신분 확인을 위해 초소까지 동행했다.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주었고 본부로 연락을 하여 인근 파출소로 신분 조회를 요청하여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비를 피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심 초병들이 고마웠다. 적의를 품던 마음이 누그러지자 초병들에게 이곳 군대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대학생이 뉴스도 안보시나 봐요. 얼마전 이 근처에서 북한 잠수함이 좌초해 잠수함 승무원들이 집단 자살한 거 몰라요?"
아차,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바지로 눈이 갔다.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산을 탈 때 군복만한 게 없는 걸 알았기에 집을 나올 때 복장은 망설임 없이 군복 바지를 선택했다.
"이런 곳에서 군복 입고 새벽까지 그렇게 바닷가에 서성이면 어떡합니까? 군복 입고 다니지 마세요."
초소를 빠져 나오니 흐린 날씨 때문에 흐리멍텅한 해가 떴다. 잠이 쏟아졌다. 새벽 6시 조금 넘어 무궁화호 입석 열차를 탔다. 기차 출입문 계단에 앉아 졸다 손님이 내리면 발에 채여 깨어나 일어났다. 그렇게 졸다가 깨어나다가를 반복했다.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비를 맞아 꼴이 거지 같았다. 몸도 마음도 세상도 모두 거지 같았다. 그래도 기차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걷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이등병 첫 훈련, 행군 때 낙오를 했다. 30도가 넘는 여름 폭염에 아스팔트 길을 박격포 포판을 메고 걸었고 행군의 속도는 빨랐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거리의 이동이었지만 아직 단련되지 않은 햇병아리 이등병에게는 무리였다. 현기증이 났고 짧은 순간에 의식을 잃었다. 우당탕 소총이 길바닥에 부딪혔고 쓰러졌다. 탈수증이었다. 철모를 쓴 머리는 화끈거리고 지끈거렸다. 그래도 걸어야 했다. 내가 져야할 무게를 누군가가 대신 져야 했고 숙영지까지 가기 위해 고참 두 명이 나를 부축해야 했다. 질질 끌려서 어떡해든 숙영지에 도착했다. 나는 드러누워 기절한 척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었다. 소대장은 걱정되어 나의 뺨을 두리며 물을 먹이고 이름을 불렀다. 고참들은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야야, 막내가 엄살부린다. 좋은 말 할 때 눈 떠!" 누군가가 허리에 찬 내 수통을 걷어찼다. 놀라서 눈을 떴다. 수치심이 몰려와 그늘에 앉아 몰래 울었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잠자기 전 점호를 마치고 나면 나는 정자세 앉아 있게 하고 내 바로 위 고참부터 상병까지 상관물대를 탔다. 낙오자가 생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얼차려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한 바탕 땀을 흘리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잠이 들지 못했다. 잘못이 없는 고참들에게 미안했고 자괴감이 몰려왔다. 또 그들에게서 돌아올 자잘한 생활 속 보복이 두려웠다. 하지만 한달 동안 그 누구도 나를 혼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자기혐오와 좌절감을 느꼈다. 말 수가 줄었고 한없이 의기소침해졌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상병 고참이 나를 불렀다.
"막내야, 그 동야 힘들었지. 네가 겪은 게 우리 부대에서는 누구나 거쳐 왔던 일이다."
"저 체력 좋은 김일병도 이상병도 나도, 첫훈련에 물집 잡힌 맨발로 전투화를 목에 두르고 고참들 부축받으며 부대로 기어 들어왔다."
"너로 인해 고참들이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고참들도 이미 다 경험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너를 혼내지 않은 거다. 다 자기들 옛날 생각했을 거다."
나는 조금 억울해서 용기내서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포가 완성되는 박격포 부대다. 한 명이 낙오하면 두 명이 쓸모 없어지는 거다. 그래서 한 명의 낙오자가 생기면 나머지 두 명이 그 사람의 무게를 감당해야한다. 어쩔 수 없다. 힘들지만 너도 적응하게 될 거다."
나는 저주받은 군대줄을 원망하며 체력을 키우기 위해 연병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스물두 살 봉지가 그 나이가 되도록 유일하게 꿈꿔온 것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감옥에 가고, 누군가는 몸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고시 패스를 꿈꾸며, 누군가는 최고의 깡패가 되기를 꿈꾸던, 그녀가 알고 있는 모두가 스무 살의 언저리에 있던 그 시절에, 그녀의 꿈은 기껏 첫사랑뿐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꿈은 세계를 연다. 문이 열리고, 이제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찬란한 빛이 문밖의 길을 밝힌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이 된다. 그녀의 꿈이, 열린 세계의 폭죽을 터뜨린다.
- 김인숙 <봉지> 중에서
"난 경찰인데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내 신분증은 왜요? 당신 정말 경찰 맞아요?"
그는 자신의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재빨리 보여주고 닫았다. 나를 놀리는 것 같았고 사복을 입은 그를 진짜 경찰일까 의심했다. 우리 동네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나 잠깐 생각했다. 짜증이 밀려 왔다. 살다살다 별 희한한 인간들이 다 나를 괴롭히는구나고. 되는 일 하나 없고 일생에서 최고로 꼬였다고 생각하던 1997년의 끝자락. 나는 왜 그러느냐고 끝까지 버텼고 그는 나에게 이집에 사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경멸의 비웃음을 날리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하다하다 별 시답지않은 일이 다 일어난다고 투덜댔다. 짜증과 설명할 수 없는 자기혐오가 올라왔다. 목구멍 깊은 곳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끈적한 가래침을 악을 써가며 퇘퇘 뱉었다.
그해 겨울 방학 나는 아무도 없는 집안에 혼자 은둔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고 내가 집밖을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 아는 슬픈 은둔이었다. 완전한 은둔. 나는 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학교 학생 운동이 저물어가는 끝자락, 지아는 총학생회 선전 일을 했고 수배 중이었다. 지아의 멜빵바지에는 늘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가족 모두가 출근하고 혼자 남은 대나무밭 앞에 쪼그리고 않아 생애 첫 담배를 물었다. 어지러웠다. 이 어지러움이 니코틴 연기가 일으킨 일시적 착란인지, 지금 내가 처한 혼돈에 몸이 반응한 것인지 헷갈렸다. 잠깐 정신을 잃고 흙바닥에 누웠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책읽거나 잠만 잤다. 졸업을 반 년 앞두고 IMF가 터졌고 취업길이 막혔다. 우유부단하게 맺어오던 어설픈 관계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긴 여행의 끝이었지만 정리되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얼마전에 문득 알게 되었다. 수배 중인 지아와 가까이 지내는 주변 사람의 물망에 내가 올라 있었을 것이고 나의 정체를 감시하러온 사복경찰이었다는 거. 그 비웃음의 의미를 지금에야 알았다. 별볼일 없는 한심한 복학생 선배 이상은 아니라는 형사의 직감적인 눈빛. 그 사실을 지금에야 알게 되다니. "여보, 당신 수배령 떨어졌을 때 우리집에도 사복경찰 왔다간 거 알아?" 얼마전 지나가는 소리로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그래?" 아내는 흘려듣고 웃었다. 내게는 아팠던 통증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주변에 환영받지 못하는 커플이었다. 과커플이었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지아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싫어했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지아를 싫어했다.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지아와 헤어지겠다는 다짐을 수십번도 더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사랑을 스스로 의심하고 번번히 도망치려했던 나를 잡아준 건 지아였다. 지아라서 우리는 결혼했다. 지금 내 아내, 김지아는 내 성장통의 중심이었으며 내 성장통의 진통제이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가장 아프게 했고, 가장 크게 성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보, 오늘은... 선생님, 오늘도 하부루타 그거 해요? 오늘은 안 틀리고 잘 해야지, 하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점심 급식 먹고 애들이랑 학교 연못에서 매일 올챙이 보러 가는데 어찌나 빨리 크는지... "
"오늘은 우리반 쌍둥이 장애 아이들 엄마 아빠랑 상담을 했는데..."
퇴근하고 지칠 법도 한데 오늘도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하루 이야기 보따리 풀어놓기 바쁘다. 우리는 한 집에 살지만 각자 다른 세상을 산다. 아내는 오늘을 살고, 나는 과거와 미래를 산다. 우리 둘이 만들어 놓은 독특한 딸과 희한한 아들도 있다. 가끔씩 과거의 김지아와 지금의 아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여보, 당신은 심리학적으로 연구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희귀한 품종의 인간이야."라고 내가 뜬금없이 말했다. "어, 내가 좀 그렇지. 나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보라니까. '기간제 교사 김지아'" "못해. 능력이 안 돼."
부산 달동네 가난한 판자집. 가난했지만 우리집엔 언제나 마당이 있었다. 아버지는 마당있는 집을 좋아했다. 여름밤,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나는 누나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누나, 누나는 궁긍하지 않아? 지금 이 시간에 미래에 나랑 결혼게 될 여자 아이는 지금 이 시간에 뭘하고 있을까? 그 아이도 지금 나처럼 저 별을 보고 있을까?"
그때 누나는 내 머리를 빡 치며 말했다.
"얌마, 뭐하긴 뭐해. 자고 있겠지. 밤인데."
아,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아내도 부산에 살고 있었으니, 그때 우리는 한 도시 안에서 살고 있었구나. 인연이란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