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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4. 2022

암을 품었던 몸

...일상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느리게




S#1. 작가 의사 (2021.6.17.목)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고 병원 일이라면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나를 몰아붙였던 스스로가 문제였다. 열심히 일할수록 지쳤다. 지쳐가는 나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은 외면했다. 나라도 나를 돌봤어야 하는데 모든 상황에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므로 방치한 채로 두었다... 내가 평온하지 못하니 내 주변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김선영 선생 역시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는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다."

내가 불안하고 편치 않으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라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자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적인 일이 아니다.
- 김범석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중에서


도전, 극복, 성공, 용기, 투쟁, 저항, 경쟁, 승리, 성공...

                                      VS

물러나기, 기다리기, 피해가기, 둘러보기, 보살피기, 자세히 보기, 느리게 걷기...


결이 다른 두 길의 언어가 있다. 첫 번째 길이 가치 있다고 배웠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고 믿고 따랐다. 2음절의 짧고 날카롭게 날이 선 언어들. 멋지고 매력적인 말들이었고 나는 쉽게 현혹되었다. 어두운 밤바다에 화려한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오징어 떼 같이 살았다. 끝내 낚시 바늘에 걸려 검은 피를 쏟으며 생을 쓸쓸히 마감하고 마는 오징어의 삶. 이 길은 자신을 깎고 잘라서 나를 상처나게 하는 삶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나이를 먹었다.


두 번째 언어의 길은 무르고 나약하다고 배웠다. 비겁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언어들을 나직이 읊조린다. 두 글자로 세련되게 대체할 단어들을 떠올려 보지만 그런 단어는 없다. 길고 느리고 울림이 있는 부드러운 허용의 언어다. 이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따라 걷는 지혜의 길이다. 실용과 합리로 간결하게 매듭짓는 삶의 언어를 믿지 않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결심했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이 쓴 책을 만났다. 그는 수많은 암환자들의 죽음과 만났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닿았다면 그의 수많은 환자들 중 나도 한 명이었을 수도 있었다. 암 치료를 하면서 나는 의사들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내 병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의사가 보는 삶과 죽음, 의사들의 생활과 변명, 의사들이 만나는 다양한 암환자들 중 나는 어는 부류의 인간인지... 


그의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수많은 암환자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의지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의사가 몸을 치료하는 직업이라면 교사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직업이다. 몸과 마음이 병들고 약한 자들은 우리같은 사람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글을 통해 내 직업의식을 재점검하게 된다. 내가 기록했던 문장과 단어들을 그의 글 속에서 만났을 때 기분이 묘하다. 전혀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의사와 환자-이 한 배를 탄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




S#2. 조직 검사 (2022.1.6.목)


9년 전, 수면마취제 약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몽롱한 상태에서 위암 선고를 받은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후 처음으로 하는 대장내시경이다. 장 속에서 뭔가 나올까봐 겁난다. 그동안 위가 없는 상태로 음식을 받아냈을 장은 괜찮을까. 대장내시경을 마치고 흐릿한 의식을 억지로 깨워낸다. 간호사가 대장에서 조직을 떼냈고 일 주일 후에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비틀비틀 문을 열고 나온다. 아내의 표정이 굳어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 뭐가 더 남았을까. 내게 던져진 다음 과제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부정의 독소를 빼내는 것. 자기긍정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과제 같은 것. 과연 나는 사랑으로 충만한 따뜻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경험 때문인가, 그 때만큼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장모에게 집밥 한 그릇을 얻어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에게 용기를 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얼마나 다행이야. 악성이든 아니든 지금이라도 발견한 게…"

"…"

평소에  많고 멘탈 강한 아내도 쉽게 입을 열지 . 어둠의 터널을 다시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암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제일 두려운  암의 재발이다. 다음  주일이   같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내맡겨 보는 수밖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과 김선영을 떠올렸다. 만약 이번에 다시 암치료를 해야하는 일이 생긴다면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김범석을 찾아 갈까, 아산병원 종양내과 김선영을 찾아갈까 고민했다. 김범석을 만나 그가 쓴 책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김선영은 그녀가 어렸을 때 암환자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일기를 찾아 책을 썼다. 암환자 아버지의 일기라는 나와의 공통분모가 있고, 내가 수술했던 아산병원 종양내과 의사여서 좀 익숙한 느낌이 든다.




S#3. 나의 주치의 (2022.1.13.목)


"여기 볼록한 부분 보이시죠? 암의 씨앗이 되기도 하는 선종. 지난주 대장내시경 때 말끔하게 잘 제거됐어요."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마치 의사가 선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재판 선고 기다리는 피고가 된 것 같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주치의의 이름표를 자세히 본다. 소화기내과 조교수, 김OO. 아산병원에서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옮기고 세번째 진료. 이제서야 그의 이름이 내 눈에 각인된다. 여자 이름인데 남자 의사다. 두번째 진료 때 그가 대장내시경을 해보자고 적극적으로 말했다. 첫 진료 때, 집 가까운 곳에서 알아서 검사하라고만 말했다. 계속 그렇게 권고만 했다면 아마 대장내시경을 미뤘을 것이다.


그는 피곤에 쩌들어 있었고 날짜를 착각하여 검사 결과를 잘못 말하는 실수를 정정하기도 했었다. 첫진료 때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주치의를 바꾸던가 병원을 집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옮기자고 아내와 얘기를 끝낸 상태였다. 최근 직장에서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저렇게 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했다.


오늘은 그의 컨디션이 나빠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설명하려고 인터넷에서 예시 사진을 뒤적거리며 찾는 노력도 보여준다. 결국 적당한 사진을 못 찾았지만 CT상의 사진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새롭게 알게된 정보가 많았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병원 규모가 너무 크고 많은 수의 환자를 6개월이나 1년 주기로 보는 상황이라 모든 환자를 기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한 의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록 직업적 원칙에 의한 말과 처치라 하더라도 간절한 환자 입장에서는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했을 나의 말과 행동에 어떤 아이는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며 고마워했었고, 어떤 아이는 졸업한 후 찾아와서 그때 자기에게 왜 그랬냐고 원망하기도 했다. 나의 직업적 태도와 마음 가짐에 대해 되돌아 본다.


"여보, 주치의 바꾸지 말자. 이 의사 아니었으면 대장내시경 시기를 놓칠 뻔 했어. 이 사람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인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암세포를 품었던 몸이다. 지난주 조직 검사를 한다는 말에 이미 암 선고를 받은 것 마냥 다리가 후들거렸다. 돌아오는 차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꼭 9년 전 오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대장내시경 반수면 상태에서 한마음병원 이지은 선생에게 위암선고를 받았다. 젊은 여의사 이지은 선생은 아산병원 육정환 교수에게서 인턴생활을 했다.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긴급환자 진료를 연결해 주었다. 진료와 수술이 2주일 만에 번개불에 콩볶듯이 이루어졌다. 이유가 있는 만남, 인연이었다.


"당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는 것 같아."

아내가 말한다.

"그래, 정신 차리고 다시 열심히 살라는 거겠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아직 더 할 일이 남았다는."

내가 대답했다.

"당신, 이번에는 여유가 좀 있는 것 같더라."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느리게라도..."

왜 걱정이 안 됐겠나. 다시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잠을 설치게 했다. 일주일이 일년 같았다. 한번 가 본 길이라서 두번 다시 가보고 싶지 않은 길. 미뤄둔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는 의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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