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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Sep 18. 2021

디오니소스를 위하여

... 술, 애증에 관한 개인사




향정신성 기계 장치는 나올까?



스티브 잡스도 자신이 겪은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LSD를 꼽았다. <멋진 신세계>에서 소마라는 합성 마약을 상상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현실 세계에서 LSD와 메스칼린에 심취했다. 약쟁이 짐 모리슨은 약쟁이 헉슬리가 쓴 글을 읽고 자기 밴드의 이름을 '도어스'로 정했다. 앤디 워홀은 암페타민을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 앤디 워홀, 비틀스, 도어스, 스티브 잡스가 약물을 창작의 도구로 삼았다고 해서 그들의 작품을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 <놀이터는 24시> 장강명 '일은 놀이처럼, 놀이는...' 중에서


LSD,  메스칼린, 엑스터시, 암페타민, 대마, 필로폰...

향정신성 약물. 인간 정신에 작용하는 약물이라면 지금 나도 먹고 있다. 뇌전증 치료에 먹고 있는 '케프라'와  '카르마인CR'이다. 뇌전증은 전 세계적으로 3900만 명 정도의 환자가 있다고 추정되며 이는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한다. 통계적으로 100명 중 1명 정도로 나쁜 인식과는 다르게 흔한 질병이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다. 좀 과한 통계 같기도 하고.


정신에 영향을 주는 약물과 육체에 영향을 주는 약물이 있다. 예술가들은 정신에 영향을 주는 약물로 창작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운동선수들은 육체에 영향을 주는 약물로 승리를 쟁취하기도 한다. 자연상태로 주어진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둘 다 반칙이다.


장강명은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장치와 약물에 의지해서 작품을 써내는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많은 예술가들을 예를 들어 정당화하는 애매한 소리를 했지만 내가 볼 땐 반칙이고 그의 말대로 '개소리'다. 운동선수들의 도핑검사는 강력하게 규제하는 추세이지만 향정신성 약물로 창작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해서 거나 마음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인과 관계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동은 물리학의 영역이다. 기계 장치로 미세하게 뇌파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약보다 더 안전하게 환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소설이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지금은 약간 무섭기도 하지만 기계는 인식이나 감정보다 자본에 지배를 받는다. 그때 인간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것들을 사용할 것이다.





디오니소스를 애증하다



"죄송하지만,"… "저와 함께 낮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선생님?"… 어차피 그녀는 점심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중에서


술이 술술 넘어간다

몽롱의 환각

광포의 폭력

열락의 평화

욕정의 타액

가식의 관계

위선의 가면

망각의 축복

모든 욕망을 섞어 술술술 마신다


마약류는 아직 나와는 먼 세계의 얘기고, 기껏해야 나는 술 정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약물보다 덜 농축되어 많은 양과 긴 시간에 노출되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알코올은 합법적인 향정신성 음료로 싸고 간편하게 취할 수 있다.

이렇게 맛없는 걸 왜 마셔? 어린 나는 아버지의 술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며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취하려고 마시지 했다. 취하는 게 뭔데? 크면 알아.


조금 컸다. 초등학교 2학년. 매일 새벽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들어오면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셨다. 할아버지의 방엔 하루도 술상이 치워진 날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막걸리 한 사발을 몰래 들이켜고 기절한 적이 있었다. 술이 조금 깨자 머리를 싸안고 방 안을 뒹굴면서 울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야가 와 이라노, 얘가 왜 이래 하며 달려왔다. 어머님, 술 냄새가 나요. 야가 술을 와 마셨을꼬. 누가 야한테 술 메겼소. 옆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 죽는다, 술 깨면 괜찮을 끼다. 할아버지는 목에 막걸리 낀 걸걸한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말대로 죽지 않았지만 죽는 게 이런 건가하고 어린 나이에 임사 체험을 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는 걸...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술 마시는 능력을 그대로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그 좋은 환각의 물약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아버지는 당신 혼자 독차지 했다. 내 염색체에는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효소를 1도 물려주지 않았다. 당신 혼자 취했고 혼자 즐거워했고 혼자 괴로워했다. 나는 그저 일인칭 관찰자로만 머물게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맨정신으로 취한 사람들을 관찰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것은 명백한 반칙이었다. 취객들은 멀쩡한 나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리고 강요했다. "자, 마셔. 이 좋을 걸 왜 안 마셔?"




아버지의 술은 내게 트라우마였다. 술은 인간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았다. 술을 마시면 아버지는 이성의 끈을 쉽게 놓아 버렸다. 단칸방에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찾아왔고, 담배를 피웠고,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를 불렀다. 흥이 넘치면 술상이 엎어졌고 어른들은 싸웠다. 아니다 싸워서 술상이 엎어졌나?

엄마의 명령을 받고 술 마시는 아버지를 찾아 동네 구멍가게로 출동나가기도 했다. 엄마가 술 그만 먹고 들어오래. 그런 날 자존심이 상한 아버지는 맥주며 소주며 잡히는대로 술을 더 많이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 날 아버지의 술주정은 밤을 새워 길게 이어졌지만 엄마와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취한 날보다 엉망으로 취해 싸울 힘조차 없는 날이 견딜만 했다.


혼자 있을 때도 아버지는 밥과 함께 국물 삼아 반주를 마셨다. 술병을 치우려는 엄마와 더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실랑이는 밥상머리 고정 레퍼토리였다. 캐캐묵은 상처들을 들추어냈고 어김없이 밥상이 뒤집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가 매달려 말렸고 나는 밖으로 도망나가거나 내 방이 생겼을 때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막고 노래를 불렀다.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은 어디서 무얼했는지 나는 모른다. 동생의 상처를 살펴보지 못한 걸 이제야 휘회한다.


사태가 진정되면 나는 감식반원처럼 현장을 찾았다. 깨진 병조각과 벽에 말라붙은 김치국물들은 부부가 나눈 상처의 흔적이었고 그들이 흘린 피처럼 보였다. 빨간 국물이 묻어있는 벽을 유심히 관찰했다. 혹시 누군가 흘린 핏자국이 아닐까하고. 자고 있는 엄마와 아버지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았다.

잠이 깨고 술이 깬 아버지는 세상 조용한 사람이었다. 나는 어젯밤 그 괴물이 이 사람이 맞는지 몇 번이고 다시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오늘밤은 쉬었다가 내일 밤이나 모레 밤 쯤이면 또 전쟁이 벌어질 것이었다. 진절머리나게 돌고도는 술과의 전쟁과 싸움판, 지리멸렬한 일상들...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래, 술 때문이다. 지금 내 관계 맺기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술자리에 가지 않아서다. 술자리에 간지 10년 전 쯤 된 거 같다. 다오니소스의 선물, 감정의 상자를 여는 열쇠. 감정의 빗장이 풀리지 않고는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술을 마셔서 함께 취하지 않고는 그 열락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속으로 들어간 기억을 따지면 20년 전 쯤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술에 취하고 싶은 날이 있다. 술이 주는 열락을 나는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세상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술이 주는 열락의 선물을 나는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술은 이기성이고, 폭력이라고 배웠다. 나는 대학선배들로부터 술은 미련함이고 육체를 고통으로 망가뜨리는 독으로 읽었다. 나는 술이 좋은 것이라고 단 한번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스스로 터득하지 못한 나의 책임도 있다.

이런 술에 취하고 싶은 지금의 마음은 뭐지? 그리고 그 마음은 순수하고 진지하다. 낭만과 희열이 가득한 디오니소스의 열락을 마시고 싶다. 안 될 것도 없지. 지금 내 몸이 허락하지 않으려나? 고민이 많은 것도 나는 술을 모르고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기 전에 그 걸 알았었다면 지금 나는 고민도 없이 술을 마실 것이다.


얼마전 아내가 혼자 마시는 맥주를 한 모금 뺏어 마셨다. 온 몸에 열기가 돌았다. 왜 이렇게 덮지 하며 윗옷을 벗어 던졌다. 지켜보던 아들이 술때문일 거라고 알려줬다. 아빠는 이제 술은 영영 안 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왜 마셨냐길래,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술, 디오니소스의 권능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은 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같이 술 마셔준 게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술 못 마시는 나 같은 사람은 '마셔 준다'고 표현해도 괜찮다. 아내가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을 발작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아버지의 술 트라우마가 아니라, 그냥 선천적으로 술 못 마시는 자기 컴플렉스다.

알코올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구 수준은 아니지만, 때로는 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잠시라도 불안을 내몰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술 안주할 만한 좋은 반찬을 만들었을 때 가끔씩 내 눈치를 보면서 술을 사오는 아내. 아내가 혼자 마신 고독주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같이 마셔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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