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가출을 꿈꾸다
나이가 들면 외로워진다고 한다. 나도 벌써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며칠 전에 만난 원로 소설가께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내게 묻기에, 마흔 아홉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더니, 당신도 그 즈음에 허무감에 빠져 지냈다고 고백했다. 덧붙여 겁을 주려는 건지 그게 몇 년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중년의 허무감이 글쓰기와 맞물리면 더더욱 회복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 윤대녕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중에서
"당신 가사일 하기 싫어서 특별연수 당첨되면 집을 나가려는 거지?"
아내의 말에 정곡이 콕 찔렸다.
"당신의 도움 없어도 위 없는 내가 혼자 먹고 움직이고 생활이 가능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이유도 있어."
라고 대답했지만, 나도 아내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
당장 아내는 내가 없는 집 가사 노동이 제일 부담스러울 것이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심각한 문제다. 특별연수 떨어져도 무급휴가 쓸 거야, 했더니 우리 돈 쓸 일 많은데, 하며 얼버무린다. 차도 새로 바꿨고, 딸 공부도 있고... 아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래 별수 없지. 돈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걸. 큰돈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버는 것도 아니어서 유세 떨 일도 아니고, 집에서 벗어나는 실험을 해보고 싶다. 서로가 부재할 때 불편함과 아쉬움 정도를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 있다.
나는 작업실을 멀리 구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로선 아내는 극구 반대다. 내가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걱정으로 떠올랐다. 글쓰기와 맞물린 중년의 허무감이란 말에 덜컥 겁이 난다. 몇 년 째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감과 허무감에 힘들어하고 있다. 무급휴직, 무급휴직, 휴직, 휴직, 휴직... 당신 미쳤냐고, 아빠 우리는 어떡하고, 라고 말리는 사람은 없다. 가족들은 내가 그러지 못하리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휴직을 실행에 옮긴다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변화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ㅡ 2022.1.2.일 '나의 일기'
현실이 된 가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아내는 같이 있으려고 하고 나는 달아나려 한다. 나의 도덕은 내가 기대고 있는 사람에게 작동한다. 지금 내 가 기대고 있는 사람은 아내다. 미안함, 자책의 감정을 느끼는 범위는 아내와 자식들 정도이다. 부정의 감정은 아껴서 소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고갈시키리란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자취방에 가져갈 생협 장을 보고 있는 동안 아내에게서 전화가 계속 걸려 온다. 롯데백화점 지하1층 식품 코너에 있는데 '고래사 어묵'을 사줄까하고, '겐츠 쌀식빵' 먹고 싶지 않느냐고, '에스티로더 스킨 크림' 다 쓰지 않았냐고 계속 물어왔다. 나는 모두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모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아이템들이다. 내 대답은 철저히 필요에 의한 것이고, 아내의 질문은 순수한 챙김의 마음이다.
아내는 집앞 주차장에 시간을 딱 맞추어 도착했다. 사온 것들을 모두 건내 받았고, 짜장면 먹고 가라는 건 거부했다. 그것 먹으면 위가 없는 나는 힘들어서 또 집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지체하는 시간이 싫은 건, 곧 장인과 처남이 병원에 누워있는 장모를 보러 도착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순간 나는 인간의 도리에 내 시간과 노력을 옭아맬 것이고 몸은 또 힘들어질 것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도 거뜬히 아무렇지도 않았을 시절에는 나의 당위는 쉽게 작동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적당히 나쁜 사람 소리 들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지켜내지 못할 상황에 처해진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자취방 돌아가는 뒷꼭지에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삶의 허무와 쓸쓸함이 항상 따라 붙는다. 나는 에릭사티의 우울, 장필순의 추억, 박원의 감성, 박소은과 타루의 발랄을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미래의 어느 때, 이 공간과 시간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자취방에 들어와 일 주일 동안 먹을 양식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다. 가끔씩 무서울 때가 있다. 나는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생각을 하고 말을 뱉어내고 나면 그 일은 현실이 되어 있다. 2년 전 딱 이때 쯤 나는 집을 나가는 것을 꿈꿨고, 1년 전 딱 이때 쯤 나는 집을 나갔고, 지금은 정말로 이러고 살고 있다.
ㅡ 2024.1.6.토 '나의 일기'